[정치] 맘대로 규칙 바꿀 수 있다…'무소불위 선관위' 만든 황당 조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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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이권도 명예도 금전도 털끝만큼의 효과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1963년 2월 4일, 사광욱 초대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의 첫번째 담화문 중 일부다. 선거의 파수꾼이라 할 만한 선거관리위원에 대한 자긍심의 표출이자 간곡한 당부다. 하지만 최근 선관위의 모습은 영 딴판이다. 고위직 자녀 채용비리 사건으로 여론의 몰매를 맞자 노태악 중앙선관위원장은 5일 “통렬한 반성과 함께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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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뉴스1

선관위의 조직적인 채용 비리와 방만한 기관 운영은 384쪽에 걸친 감사원 감사 보고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선관위에 대한 불신이 부정선거론을 더 키웠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 위원장이 “외부 통제 방안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고, 김용빈 선관위 사무총장도 국회에서 “입이 10개라도 변명해선 안 된다. 채용 비리는 완전히 척결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말했지만, 선관위의 자정 기능은 사실상 시효가 끝났다는 평가다. 선관위의 뿌리 깊은 부패를 도려내기 위해 법률 제정은 물론, 필요할 경우 개헌 등 '플러스알파'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①음서제 길 열어준 규칙 제·개정권
선관위 고위직 자녀들은 어떻게 필기시험도 없이 면접만으로 경력채용공채(경채)에 합격할 수 있었을까. 헌법상 독립기구인 선관위는 행정부와 달리 자체적으로 규칙을 바꿀 수 있다. 선관위는 2014년 전문성을 필요로하는 경채 필기시험을 적격성 조사로 대체하는 조항을 만들었다. 이후 2016년부터 10명의 전직 사무총장·사무차장 등 고위직 자녀와 친인척이 이를 통해 선관위 직원으로 신분을 바꿔 근무 중이다. 경채가 음서제의 통로가 된 것이다.

정해진 규칙도 무시되기 일쑤였다. 선관위는 2015년 면접위원의 2분의 1 이상을 외부위원으로 위촉하도록 규칙을 바꿨지만, 정작 채용 비리 사건에선 ‘아빠 지인’으로 구성된 내부 인사들이 면접위원으로 참여했다. 2020년 1월 김세환 전 사무총장의 아들 채용과정에서 중앙선관위 인사담당자는 상위 규칙이 아닌 인사운영기준(내부 지침)을 근거로 김 전 총장과 근무연이 있는 내부 인사들로 면접위원을 꾸리도록 했다. 이들은 만장일치로 김 전 총장의 아들을 선발했다. 당시 인사담당자는 현재까지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당장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기구를 꾸려 규칙 제·개정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차진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기구의 의견을 듣고 규칙을 개정한다면 자정 기능도 강화하고, 헌법이 규정한 선관위의 독립적인 지위도 지킬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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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준홍 기자

②상임위원 나눠먹기 관행
독립기관인 선관위의 조직 문화는 폐쇄적이다. 선관위 공채 출신이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1급 자리인 시·도 선관위 상임위원 자리까지 짬짜미한다. 이 자리는 교수나 법조인 등에도 개방돼있지만 ‘4급 이상 공무원 중 선거사무에 7년 이상 종사한 사람’이라는 내부 규정을 만들어 사실상 내부 인사만 채용될 수 있게 했다. 전직 선관위 관계자는 “상임위원 나눠 먹기는 관행이었다”며 “외부 상임위원 구성 비율을 법률로 강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선관위의 개방형 채용은 2023년 채용비리 의혹이 본격화하기 전까지 전무했다. 행정부의 각 부처가 고위공무원과 과장급 직위의 20%까지 개방형으로 채용할 수 있도록 한 것에서도 비켜나 있었다. 전문성을 강화하고 내부 카르텔을 깨뜨리자는 개방형 채용에서도 선관위는 무풍지대였던 셈이다. 선관위는 채용비리 문제가 터진 이후인 2023년 12월에야 판사 출신인 임정수 감사관을 첫 개방형 채용 방식으로 뽑았다.

대법관이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겸직해온 관행을 깨고 상근 위원장 체제로 바꿔 책임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진단도 나온다. 현행법은 9명의 선관위원 중 1명을 위원장으로 호선하도록 하는데, 관례상 대법원장이 지명한 대법관이 위원장을 맡아왔다. 김민전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9월 법관이 각급 선관위원직을 겸직하지 못하게 하는 법원조직법·선관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권익위원회도 2023년 6월 “헌법기관이자 행정기관의 책임자를 사법부에서 맡는 것은 삼권분립 원칙에 어긋난다”며 법관의 선관위원직 겸직 제도를 개선하자는 의견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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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준홍 기자

③행정부가 선거 업무 담당
개헌을 통해 선거 사무를 총괄하는 선관위의 권한과 역할을 나누면서, 감사원의 감사 권한을 명확하게 규정하자는 의견도 거론된다. 미국의 경우 주요 선거 사무는 주와 지방자치단체가 담당하고, 연방선거관리위원회는 정치자금 규제와 제도 개혁 업무를 맡는다. 일본 중앙선관위는 비례대표 선거만 관리하고, 일본 내각의 한 부처인 총무성이 실질적으로 선거를 총괄한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선거법을 선거 관리 중심으로 바꾼 뒤 선거 업무를 행정기관에 맡겨도 문제가 안 된다”며 “제대로 된 민주 사회라면 행정부가 선거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 맞다”고 설명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개헌으로 감사원이 독립된 헌법기관이 된다면 감사원의 선관위 감사도 문제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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