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박사 모셔간다" 말도 옛말… KAIST 나와도 '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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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반도체 실험실 모습.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 없음. 연합뉴스
지난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에서 자연과학 계열 박사 과정을 마친 A씨는 약 8개월째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당초 대학원에 진학할 땐 연구자를 꿈꿨지만 유학을 갈 수 없게 되면서 취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제약회사 등을 알아보던 그는 취업 시장의 치열한 경쟁을 체감했다. 그는 “채용 공고 자체가 많지 않은 데다, 대부분이 학·석사 또는 산업 경력이 3년 이상인 박사를 뽑는다”며 “신규 박사를 대상으로 하는 공고는 거의 없는데 공부 외에 어떤 일을 해야 할 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얼어붙은 취업 시장에 “박사를 모셔간다”는 말도 옛말이 됐다. 지난해 박사 학위 취득자 10명 중 3명이 ‘무직’으로 집계되는 등 학위를 받더라도 곧바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서울대 공학 계열 박사 과정을 올해 8월 졸업할 예정인 B씨는 “불과 2년 전만 해도 기업들이 리크루팅(구인)을 먼저 와서 할 정도였는데,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뚝 끊겼다. 오는 6월부터 입사 원서를 쓰면서 박사후연구원(포닥)도 알아볼 계획”이라고 했다. 서울 지역 다른 대학에서 인문 계열 박사 학위를 받은 C씨는 “정규직 연구원‧교수 자리에 지원하고 있지만, 대학들이 인문 강의를 줄이는 추세라 일을 구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고 했다.

지난 6일 서울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2025 상반기 채용박람회'에서 한 학생이 홍보물을 살피고 있다.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 없음. 연합뉴스
이들이 체감하는 고용 한파는 통계에서도 나타난다. 최근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이 발표한 ‘2024년 국내 신규 박사 학위 취득자 조사’에 따르면 신규 박사 학위 취득자 중 미취업 상태로 구직 중이거나, 당분간 구직 계획이 없다고 답한 이들의 비율이 29.6%로 집계됐다. 10명 중 3명이 ‘백수 박사’라는 의미다. 관련 조사를 시작한 2014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이 설문은 전국 대학에서 2023년 8월과 2024년 2월에 졸업한 박사 학위 취득자 전체를 대상으로 진행해, 이 중 1만442명이 응답했다.
올해 취업 시장은 전반적으로 위축된 양상이다.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가 매출액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설문에 응답한 기업 10곳 중 6곳(61.1%)이 ‘상반기 신규 채용 계획이 없거나 미정’이라고 답했다. 1년 전보다 6.6%포인트 높아진 수치다. 특히 이·공계 분야 채용에선 지난해 윤석열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여파가 있다고 기업들은 입을 모았다. 면역학 박사과정생인 김모(27)씨는 “연구원과 기업이 채용에 소극적이라 취업은 물론 이직도 힘들다. 연구직들은 언제 재계약이 불발될지 몰라 불안하다”고 했다.

지난해 '학위수여식 R&D 예산 복원 요구 입틀막 강제퇴장에 대한 대학생·졸업생 대책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은 채동주 한국과학기술원(KAIST) 21학번 학생이 대전 유성구 카이스트에 대자보를 붙이고 있다. 뉴스1
일자리는 한정적인데 고학력자는 많아지는 ‘학력 인플레이션’도 한 원인으로 꼽힌다. 코로나19 시기를 포함해 최근 몇 년간 취업 시장이 어려워지면서 석·박사 진학을 택한 학생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생명공학 박사과정생인 강모(27)씨는 “한정된 일자리를 두고 더 많은 사람이 경쟁하면서 박사가 석사 직무에, 석사가 학사 직무에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성인역량조사 따르면 한국에서 최종 학력 수준이 일자리에서 요구하는 학력 수준보다 높은 경우의 비율은 31.3%로 OECD 평균치(23.4%)를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다 보니 해외로 눈을 돌리는 경우도 많다. 오는 8월 광주과학기술원(GIST·지스트) 박사과정을 졸업하는 D(29)씨는 “한국은 연구에 지원을 많이 안 한다는 인식이 (석·박사들에게) 퍼지면서 더 충분한 예산으로 프로젝트를 할 수 있는 미국 등 해외에 나가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지난해 8월 공학 분야 박사학위를 받은 E(30)씨도 “잘하는 사람들이 일자리와 투자를 찾아 해외로 나간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고급 인력의 이탈을 막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최영기 한림대 경영학과 객원교수(전 한국노동연구원장)는 “저성장 국면일수록 정부가 신(新)산업 방향성과 인력 수요에 대한 로드맵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고급 인력이 국내에서 일하게 할 수 있는 투자와 훈련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업들이 비용 절감을 위해 채용·인력부터 줄이는 경영 관행을 바꿔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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