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접어도 그려도 조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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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우손갤러리에서 소개되고 있는 김인겸의 대표작 ‘빈 공간(Emptiness)’ 연작 중 하나. 전시는 ‘접기’를 통해 평면에 숨겨진 공간성을 탐구한 작가의 실험을 보여준다. [사진 김산 작가]

미술비평가 딸이 전시를 기획하고, 아들은 전시 작품 사진을 직접 찍었다. 그들의 아버지이자 조각가인 김인겸(1945~2018)은 그 자리에 없었지만, 전시장을 채운 작품들이 그 무엇보다 강력하게 그의 존재를 대신했다. 지난 6일 대구 봉산동 우손갤러리에서 개막한 전시 ‘조각된 종이, 접힌 조각’은 작고한 작가와 딸 김재도 홍익대 초빙교수, 아들 김산 사진작가 등 3인의 협업으로 이뤄졌다.

김인겸은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100주년을 맞아 한국관이 건립된 해, 곽훈·윤형근·전수천 등과 함께 한국관 대표로 전시에 참여한 예술가다. 당시 그는 한국관 내부 1~2층으로 이어지는 원형 전시장을 작품의 요소로 끌어들여 건축적인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자칫하면 몇 장의 스틸 사진으로만 남을 뻔했지만, 작가는 자기 주머니를 털어 비디오 작가를 고용해 전시 현장을 찍었다. 영상은 당시 기술의 한계로 ‘홈 비디오’ 수준의 화질로 남았지만 한국 현대 미술사에 중요한 역사적 현장이 담긴 귀한 자료다. 이번 전시엔 그의 1990년대 중요한 설치 작업 2점이 영상과 모형으로 소개된다. 대구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가 주목 받는 이유다.

전시는 ‘접기’라는 독특한 조형 방식이 두드러지는 작품들로 구성됐다. 딸 김씨는 “아버지가 1996년 퐁피두센터 초대로 파리로 건너간 이후 작품의 변화가 컸다”며 “그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을 모았다”고 소개했다. ‘접힌 조각’과 평면 종이에 담은 ‘드로잉 조각’을 통해 조각의 기존 개념을 넘어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했던 작가를 드러내는데 주력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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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우손갤러리]

그 중 대표적인 게 ‘빈 공간(Emptiness)’과 ‘스페이스리스(Space-Less·사진)’ 연작이다. 청동 주조를 사용해 조립하는 방식으로 작업한 김인겸은 1990년대 중반 이후 면(面)의 성격이 강조되는 입체 작품을 선보였다. 나아가 종이 위에도 조각의 개념을 실현했다. 고무 패킹이 달린 밀대(스퀴즈)에 먹과 잉크를 묻혀 종이 위에 여러 차례 밀어냄으로써 자국을 남기는 작업이다. 스퀴즈 작업은 마치 투명한 실크 천이 겹쳐 있는 듯한 이미지로 보는 사람에게 각 면 사이의 공간을 느끼게 한다. 작가는 이 작업을 ‘데생 조각’이라 불렀다.

바닥에 설치된 5개 보트 모양의 2004년 작 ‘빈 공간’은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 갔을 때 각 입체가 전하는 공간감이 크게 달라진다. 바깥 표면은 스테인리스 스틸이지만, 안쪽 표면은 빛을 모두 흡수하는 블랙 미러로 마감돼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을 들여다보듯 아득한 느낌을 준다. 전시장 벽에는 종이 접듯 철판을 접은 조각들이 ‘그림’처럼 걸렸다. 1997년 파리 퐁피두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던 그는 작가 노트에 “요즘 나는 물감도 접고, 종이도 접고, 철판도 접는다. 그리고 공간을 만든다. 마음도 한쯤 접어놓고 텅 비어진 기분”이라고 썼다.

비디오로 소개되는 1992년 작 ‘프로젝트-사고의 벽(The Walls of Thought)’은 미술관 안에 녹슨 철판을 이용해 여러 개 방으로 공간을 구성한 대규모 작업이다. 33년 전 당시 5톤 트럭 여덟 대 분량의 철판이 사용됐다. 딸 김씨는 “‘사고의 벽’은 아버지가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작업”이라며 “언젠가 큰 전시 공간에서 이 작품을 꼭 재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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