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소년중앙]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떠나는 16~17세기 한양 번화가로의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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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개발하며 옛 유적 지킬 수 있을까
'공평동 룰'로 해결방법 찾았죠
2025년 현재 약 933만 명이 사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1392년부터 1910년까지는 조선(朝鮮)의 수도 한양(漢陽)이었어요. 또 고려시대에는 삼경(三京) 중 남경(南京·남쪽의 수도)이었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도읍지인 위례성이 있었던 곳이죠. 그 말은 현재 약 933만 명의 사람들이 일상을 꾸려가는 서울이란 도시에는 여러 층위의 시간이 녹아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공부하는 학교, 친구와 노는 공원은 오래전 역사책에서 접한 우리 조상들이 생활하던 지역이었다는 거죠. 그렇다면 수천 년 혹은 수백 년 전에 살던 사람들의 흔적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소중 학생기자단이 16~17세기 조선시대 한양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을 찾아 문화층에 대해 알아보고, 도시 개발과 주거유적 보호라는 두 가지 가치가 공존할 수 있는 방법도 살펴봤습니다.

정하은(서울 노원중 1)·이서준(경기도 평촌중 1)·박준후(서울 경인초 6·왼쪽부터) 학생기자가 서울 종로구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을 찾아 16~17세기 한양 문화층을 살피고 '공평동 룰'에 대해 알아봤다.
서울 종로구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수도권 지하철 1호선 종각역에서 걸어서 1분 거리인 번화가 한복판에 있습니다. 광화문과도 약 650m 정도 떨어진 위치예요. 흔히 박물관 하면 독립적인 건물을 갖추고 유리로 된 전시장 안에 많은 유물이 전시된 모습을 생각하죠. 하지만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있는 건물은 지상 26층의 고층 빌딩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가야 입구가 나오죠. 일반적인 박물관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김성룡 학예연구사는 "이는 공평동도시유적전시관이 어떻게 건립이 됐는지를 알아야 이해가 되는 부분"이라고 설명했어요.
'공평동 룰' 첫 사례 공평도시유적전시관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매장유산법)'에 따르면 토지·수중이나 건조물 등의 부지에 매장된 문화유산을 매장유산이라고 해요. 국가·지방자치단체 등 개발사업을 계획·시행하고자 하는 자는 매장유산이 훼손되지 않도록 해야 하죠. 그래서 '국가유산영향진단법'에 따라 개발계획의 주체나 건설공사는 개발·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국가유산의 가치를 보호하고 이를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들이 누릴 수 있도록 해당 개발·공사가 매장유산의 보존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행위인지 여부를 미리 조사·예측·진단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공평동도시유적전시관은 일반적인 박물관들과는 달리 도심 한복판에 있는 고층 빌딩 지하 1층에 있다.
2015년 공평1·2·4지구 재개발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2010년 문화재 지표조사, 2014~15년 매장문화재발굴조사가 실시됐죠. 그 결과 해당 지구에 조선 초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총 108개 동 건물지와 도로·골목길 등의 유구, 1000여 점이 넘는 생활유물이 확인됐어요. 이렇게 개발 예정 부지에서 매장유산이 발견되면 많은 제약이 생기며 개발 주체의 경제적 피해와 매장유산 보호 의무가 충돌하게 되죠.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도심 개발의 경제적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땅속 주거유적을 광범위하게 보존할 수 있는 제도인 '공평동 룰'이 적용된 첫 사례예요.
"공평동 룰은 도심정비사업에서 발굴되는 매장문화유산을 최대한 ‘원위치 전면 보존’한다는 원칙인데요. 매장문화유산을 고려한 건축설계를 하면 매장문화유산 보존 면적에 따른 용적률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식이에요. 쉽게 말해서 매장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전시관을 건물에 조성해 기부하면 건물 설계를 변경해 최고층수를 더 높여주는 거죠."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서는 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발견된 16~17세기 조선시대 집터를 이전·복원해 보존하고 있다.
융적률은 대지면적에 대한 연면적을 말해요. 예를 들어 100㎡의 대지에 층마다 50㎡ 면적의 3층 건물이 들어섰다면 이 건물의 용적률은 150%입니다. 빌딩 센트로폴리스 건물 지하 1층에는 재개발 부지에서 대단위로 발굴된 도로·골목·집터를 최대한 원위치와 가깝게 이전·복원한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2018년 개관했어요. 동시에 서울시는 지하 공간 활용이 일부 불가능해진 민간사업자 측의 손실 보상 차원에서 용적률을 더 부여해 기존 계획에 각각 22층과 26층이었던 건물 A·B동 모두 26층으로 짓도록 했죠.
소중 학생기자단이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 들어서자 마을 하나 정도 규모의 여러 골목길과 집터가 눈에 들어왔어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의 연면적은 3817㎡에 달합니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알루미늄 그레이팅 관람통로의 유리 바닥 아래로 유구가 눈에 들어왔죠. 유물이 있어 과거의 문화를 아는 데 도움이 되는 지층(地層)을 문화층(文化層)이라 해요. 공평동 유적에서는 총 4개의 시대별 문화층이 확인됐는데, 그중 16~17세기 문화층 유구가 상태가 가장 온전히 남아있고 학술 가치가 높아 복원 문화층으로 선정됐죠. 잔존 상태가 좋지 않은 문화층은 기록으로 남겼어요.

'목각 수선총도'에서 공평동 유적이 있던 조선시대 한양의 견평방 위치를 살펴본 소중 학생기자단.
서울의 공평동에서 한양의 견평방으로
그렇다면 16~17세기 공평동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김 학예사가 박준후·이서준·정하은 학생기자를 사대문 안 한양의 모습을 목판으로 제작한 '목각 수선총도(首善總圖)' 앞으로 데려가 견평방(堅平坊)이라고 적힌 지역을 가리켰어요. "수선(首善)은 으뜸이라는 의미로 '임금이 사는 수도'인 한양을 나타내며, '수선총도'는 한양의 지도라는 의미죠. 공평동은 조선시대 행정구역 중 한성부 중부 8방 중의 하나인 견평방의 전동·금후부동·발리동·이문동의 일부와 괴동을 포함하는 지역입니다. 견평방은 현재 서울시 행정구역으로 청진동·공평동·인사동 일대예요."
'목각 수선총도'를 살피던 준후 학생기자가 "이 지역에는 어떤 사람들이 주로 살았나요"라고 궁금해했죠. "상업에 종사하던 중인들이 많이 살았어요. 조선시대에는 각종 상인들이 무질서하게 상행위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가에서 상점을 건축해 상인에게 빌려주었는데 이러한 상점을 시전 행랑이라 해요. 시전은 도성 내 주민에게 짚신·쌀·생선·비단·면 등 생활용품을 판매하고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하는 기능을 했죠. 또 중국 사신이 가져온 물건의 일부를 일반 주민에게 판매하기도 했고요. 조선시대 견평방에는 시전의 중심가인 운종가가 있었어요. 그 뒤편 북쪽이 바로 공평동 유적이죠. 시전 배후 공간에 해당해 상업에 종사하는 중인들이 많이 살았어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선 관람 데크나 유리바닥을 통해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보존된 유구를 살펴볼 수 있다.
또 견평방 부근에는 조선시대에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중죄인을 신문하는 일을 맡아 하던 의금부가 있었죠. 이렇듯 견평방은 사람과 물건으로 항상 북적였던 곳인데요. 김 학예사의 설명을 듣던 서준 학생기자가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은 어떤 것이 있나요"라고 질문했습니다. 공평동 유적에서는 시전 부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상공업 관련 물품이 다수 발굴됐죠. 17세기 후반부터 도성을 중심으로 유통됐던 상평통보는 물론, 청나라 건륭제 때 만들어진 건륭통보, 일본 에도시대 화폐인 관영통보도 일부 출토됐어요. 이를 통해 조선시대 한양에서는 적은 수량이나마 이웃 나라 화폐까지 거래됐음을 알 수 있죠.
글자나 부호 등의 명문이 표시된 다수의 백자·분청자·청자도 공평동 유적의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여러 개의 명문자기 조각을 살폈는데요. 모두 바닥에 '덕향 '귀금' '향옥' '은비' 등 여성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한글이 쓰여 있었죠. "당시에는 집안에 대소사가 있거나 잔치를 벌일 때 이웃의 그릇을 빌려 쓰거나 그릇을 빌려주는 세기전을 이용했어요. 그릇을 되돌려 받으려면 소유관계를 나타내는 여러 표시가 필요했겠죠."

상업이 활발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견평방은 한양의 다른 지역과 비교했을 때 한옥의 비중이 높고, 가옥의 밀집도가 높은 편이었다.
상업이 발달하면 자연스럽게 돈이 모이고, 부자가 된 사람들은 자신의 재력을 드러내는 소비를 하고 싶어 하죠. 전시관 한쪽에는 공평동 유적에서 출토된 중국에서 수입된 청화백자 조각이 있었습니다. 청화백자란 순백의 백자에 푸른 문양을 그린 도자기로, 조선에선 15세기 중반부터 생산했어요. 푸른 문양은 중국에서 수입한 값비싼 코발트 안료로 그렸기 때문에 귀한 청화백자는 왕과 왕실의 전유물이었죠. 한양의 부유층은 조선에서 만든 청화백자 대신 중국산 청화백자를 들여와서 썼습니다.
공평동 유적에서 출토된 청화백자의 일부인 '백자청유음각용문동체부편'은 중국 원나라 때 제작된 고급 백자로, 외면에 용무늬를 제외하고 모든 부분에 청색의 유리질 안료를 발랐죠. 이렇게 귀한 청화백자를 사치품으로 소비했을 만큼 공평동 유적에 살았던 사람은 부유한 생활을 누렸어요.

문양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 청색 안료를 바른 매병. 공평동 유적에서는 이와 같은 중국에서 수입된 청화백자가 여러 점 출토됐다.
다른 한쪽에는 청동접시·청동발·청동향로 등 공평동 유적에서 출토된 제사에 사용했던 청동제기들이 전시돼 있었어요. 이 또한 공평동 유적에 살던 사람들의 경제력을 엿볼 수 있는 유물입니다. 조선은 예를 중시하는 성리학을 국가의 근본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에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는 매우 중요한 의무였습니다. "청동제기는 청동기 시대가 끝난 뒤에도 사치품으로 소비됐어요. 가격이 굉장히 비쌌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계층이 매우 제약적이었죠."
지금까지 공평동 유적에 해당하는 지역의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그들이 남긴 유물을 통해 알아봤는데요. 조선시대 당시 번화가였던 공평동 시전 거리가 어떤 모습이었을지는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의 대표작인 『혜원전신첩』의 한 장면인 '주사거배'를 통해 상상해 볼 수 있어요. '주사거배'는 조선 후기 선술집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죠. 청색치마를 입은 주모, 심부름하는 동자, 도포를 입은 선비, 초립을 쓴 무예청 별감 등이 등장하며, 특히 깔때기를 쓴 의금부 나장의 모습이 보이는데요. 앞서 언급했듯 나장의 근무처인 의금부는 지금의 공평동 유적 근처에 있었죠.

공평동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향로. 청동제기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그릇과 달리 신성한 의미를 품한 귀한 물건이었다.
시전 주변은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러 계층의 사람이 활동하는 무대였어요. 김 학예사가 당시 시전 거리에서 볼 수 있었을 사람들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먼저 순라꾼은 조선시대 한양 도성의 야간 순찰대를 가리키는 말로 야경꾼이라고도 했어요. 통행금지가 시작되는 밤 10시경 손전등 역할을 하는 조족등을 들고 통행금지를 알리는 나무 딱따기를 울리며 2인 1조로 움직였죠. 전기수는 직업으로 소설을 낭독하는 사람을 말해요. 이들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전 거리에서 정기적으로 이야기판을 벌렸는데, 가장 재미난 대목에 이르면 잠시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그다음 대목을 듣고 싶어 돈을 던져주면 낭독을 계속했죠."
손님이 오면 다가가 어떤 물건을 찾는지 묻고 해당 가게에 데려가 흥정을 붙인 뒤 가격을 조정해 거래를 성사시키고 수수료를 챙기는 여리꾼도 시전 거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직업이었습니다. 또 지방에서 올라온 기생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고 기방의 영업으로 발생하는 이익의 일부를 차지하는 왈짜들도 있었죠. 기방의 운영자이자 주요 고객이기도 했던 왈짜들은 대전별감, 포도청 포교, 의금부 나장 등 직책이나 신분은 그리 높지 않지만 힘깨나 쓰는 부류들이 많았어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서는 갓을 쓰고 도포 입는 쓰는 체험을 할 수 있는데요. 소중 학생기자단은 갓과 도포를 걸치고 당시 시전 거리를 걷듯 전시관 안을 거닐었죠.

시전 주변은 전기수·순라꾼·여리꾼 등 다양한 사람들이 활동하는 무대였다. 왈짜처럼 포즈를 취한 이서준 학생기자.
이렇게 경제·정치·문화적 중심지였던 만큼 견평방의 가옥 밀집도는 매우 높은 편이었어요. 소중 학생기자단은 수동집 모형을 통해 당시 견평방에 있던 일반적 가옥의 구조를 살펴봤죠. 수동집은 두 가옥이 한 필지 위에 자리 잡은 형태인데요. 큰 집 본채와 부속채가 먼저 있던 상태에서 작은 집이 새로 들어섰어요. 즉 큰 집과 작은 집이 서로 붙어있다시피 한 형태죠. 밀집도가 높은 견평방 가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예요.
수동집 모형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이문안길 작은집이 나오는데요. 조선시대 야간 통행자를 검문하기 위해 마을 입구에 세우는 구조물을 이문이라 해요. 발굴 조사 당시 공평동 유적 동쪽 끝에서 옛 이문 자리로 이어지는 폭 505~518cm의 길이 확인됐는데, 이문 안쪽으로 난 길이라 하여 '이문안길'이라 부르죠. 이문안길 끝에 인조가 어린 시절을 보낸 능성구씨 가옥이 있었기 때문에 드나드는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 이문을 세운 겁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김성룡(맨 오른쪽) 학예사와 함께 한옥의 목구조를 복원한 이문안길 작은집을 둘러봤다.
이문안길 작은집은 온돌과 마루, 아궁이 등 주택 바닥구조가 모두 발굴됐고 이를 근거로 한옥의 목구조를 복원한 상태였어요. 이를 통해 당시 이 지역에서 일반적이었던 가옥이 넓이가 실제로는 어느 정도였는지 체감해볼 수 있어요. 대청마루·마루방·부엌 등이 다 있었음에도 6칸에 불과할 만큼 작죠.
하은 학생기자가 "조선시대는 지금과 그리 멀지 않은데 어떤 과정으로 인해 전기·중기·후기 등 여러 문화층이 땅에 묻힌 건가요"라고 궁금해했어요. "임진왜란과 같은 큰 전쟁이 일어나거나, 대규모로 불이 나면 사람들이 떠나는 거죠. 전쟁이 끝나거나 화재가 진압돼서 사람들이 돌아왔을 때는 집은 다 타버리고 터만 남는 경우가 많은데, 그 위에 다시 집을 짓고 살면서 문화층이 생성된 겁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공평동 유적에서 발굴된 조선시대 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4개의 문화층을 살폈다.
'공평동 룰'이 우리에게 남긴 것
조선시대 견평방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이 변화하면서 공평동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모습도 변했어요.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는 일본식인 공평정으로 명칭이 변경됐다가 해방 이후 1946년 다시 공평동이 됐죠. 이 시기 공평동 유적 주변 골목에는 법률사무소·건축사무소·인쇄소 등 다양한 근대적 시설이 새롭게 자리 잡았고, 설렁탕집·선술집·요릿집도 있었어요. 또 시전거리 자리에는 공산품 판매점과 야시장·공설시장·백화점이 등장하기도 했죠.
"조선시대 시장 골목이나 견평방이 있는 한양 중부지역 사람들의 삶은 기록으로 많이 남아있지만, 실제로 확인하기는 어려웠죠. 왜냐하면 이 지역은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 이어 대한민국에서도 수도의 역할을 맡아 많은 사람이 몰려 살고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조사·발굴하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재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러 역사적 기록을 뒷받침할 만한 유적이 발견된 겁니다. 그런 점에서 공평동 유적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흔적이에요."

'은비'라고 적힌 백자저부편. 이웃이나 세기전에서 그릇을 빌렸을 때 소유관계를 식별하기 위해 이름을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공평동 룰을 적용한 공평도시유적이 중요한 이유는 도시 개발을 통한 경제적 이익 실현과 매장유산 보존이라는 두 가지 가치가 충돌했을 때 새로운 선택지가 될만한 좋은 선례이기 때문입니다. 그간 서울의 대단위 도시개발 과정에서 발굴됐던 유적은 사업성 등을 고려해 유적의 주요 부분 일부만을 신축 건축물의 내부에 옮겨 전시했어요. 하지만 공평동 룰이 처음으로 적용되면서 향후 도시유적을 최대한 원위치에 가깝게 보전하기 용이한 매장문화재 전면 보존의 전제와 기준이 마련된 거죠.
실제로 탑골공원 바로 옆인 인사동 ‘공평 15·16지구 재개발’에서도 이 룰이 그대로 적용됐어요. 2021년 문화재법에 따라 재개발을 앞둔 부지 내 유적을 조사하던 중에 15세기 세종대부터 16세기 선조대 사이에 주조·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활자 실물이 출토된 것이죠. 이 금속활자가 특히 눈길을 끄는 이유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가 반영된 가장 이른 시기의 한글 금속활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종~중종 때 제작된 자동 물시계의 주전으로 보이는 동제품,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도 등이 출토됐죠. 서울시는 이러한 매장유산을 보존·전시하는 전시관을 지하에 조성하는 대신 해당 부지에 들어서는 건물의 용적률을 높여 최고층수를 17층에서 25층으로 변경하기로 했어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들어선 센트로폴리스 빌딩과 같은 방식인 거죠.

박준후·정하은·이서준(왼쪽부터) 학생기자가 서울시 종로구 공평동에 있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을 찾아 16~17세기 한양 번화가의 모습을 살폈다.
공평동 룰은 이렇게 매장유산 보존과 도시 개발이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어우러지는 관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어요. 이는 서울시처럼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많은 건물이 빽빽이 들어선 거대 도시에서는 특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또한 박물관은 전시장 안에 있는 유물을 관람하는 곳이라는 고정관념을 타파하기 좋은 사례이기도 하죠.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과거에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남긴 문화유산은 어떻게 현대를 사는 우리와 잘 공존할 수 있을까요. 공평동 룰과 함께 생각해 보세요.
동행취재= 박준후(서울 경인초 6)·이서준(경기도 평촌중 1)·정하은(서울 노원중 1) 학생기자
참조기 뼈가 공평동에서 발견된 의미

참조기 이석.
공평동 유적에서는 조선 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총 4개의 문화층이 발굴됐어요. 그중 16~17세기 문화층이 잔존 상태가 좋아 복원 문화층으로 선정됐는데요. 그보다 한층 앞서는 조선 전기(15~16C) 문화층에서도 흥미로운 자료가 발견됐어요. 건물지의 한 구덩이에서 수천 개의 부서진 참조기 뼈가 출토된 거죠. 참조기의 귀 안쪽 뼈인 이석의 개수(한 마리당 2개)를 기준으로 개체 수를 추산하면 대략 최소 557마리에 이르는데요. 조선시대 농업서인 『증보산림경제』에 따르면 당시 조기는 '석수어'라 불리며 먹거리로 큰 인기였다고 하는데, 그 증거가 땅속에서 나온 겁니다. 이처럼 문화층을 잘 연구하면 해당 문화층에 살던 사람들이 남긴 작은 흔적만으로도 이들의 생활상을 추측할 수 있답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역에는 어떤 문화층이 있으며, 이들 문화층에는 어떤 유물이 있을지 한번 찾아 보세요.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공평동 유적, 들어보셨나요? 저는 한국의 많은 유적을 알고 관심도 많지만 공평동 유적은 이번 취재로 처음 알게 됐어요. 매우 높은 건물 지하 1층에 위치한 이 생소한 전시관에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번화가였던 공평동의 흔적이 온전히 남아있어서 놀라웠죠. 그곳에서 발견된 항아리나 접시 같은 유물들과 우리가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골목길과 집터 등이 어떻게 긴 시간 동안 파손되지 않고 잘 버텼는지 신기했죠. 또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는 다양한 체험도 있었어요. 저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는 체험과 기와로 지붕 쌓기 활동이 제일 기억에 남았어요. 소중 학생기자단이 되고 첫 취재를 특별하고 의미 있게 마무리했습니다. 앞으로 전시관 하면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제일 먼저 생각날 것 같아요.
박준후(서울 경인초 6) 학생기자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문안길 옆 작은 집이었어요. 좁지만 갖출 건 다 갖춘 알뜰한 집이었죠. 당시 견평방의 가옥은 대체로 좁은 곳이 많았다고 해요. 하지만 그곳에는 오늘날의 집에서는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아늑함이 있었죠. 전시관 곳곳을 돌아다니며 보이는 터가 옛날에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생각하며 걷는 재미도 있었어요. 복원 전문가들이 집터만 보고 어떻게 모양을 재현해내는지 궁금했는데, 그 시대의 경제 상황, 방에서 발견된 그릇 등의 유물을 보고 집의 모습을 복원한다는 것을 알게 됐죠.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발굴이 어려운 서울의 큰 건물 지하에 한양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유구와 유물을 전시한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취재를 통해 도시 아래에 있는 매장문화유산에 관한 여러 지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서준(경기도 평촌중 1) 학생기자
이번 취재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서 다양한 문화층의 유적들을 구경하고 김성룡 학예연구사님의 설명을 듣는 뜻깊은 시간이었어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공평동 룰'을 적용한 첫 사례라고 해서 무엇인지 궁금했었는데요. 문화유적 보존과 재개발 사이에서 합의를 하여, 양쪽 모두를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룰이라고 생각했죠. 또 그 집터와 유물만 보고도 어떤 시대에 있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어요. 마지막에 학예연구사님께서 "문화재란 단순히 박물관에 진열된 것이 아니라 땅속에도 묻혀있는데, 그것들 또한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해주셨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았어요. 계속 발굴하다 보면 더 다양한 매장문화유산이 계속 나올 텐데 더 많은 사람이 그 유물들의 진가를 알고 관심을 가지면 좋을 것 같아요.
정하은(서울 노원중 1)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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