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씻는다는 것의 역사’를 펴낸 이인혜 전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사가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중앙일보와 만났다. 이곳은 박물관 야외에 조성된 추억의 거리로 옛날식 목욕탕을 재현한 ‘장수탕’(모형)이 있다. 김성룡 기자

따뜻한 물에 몸을 충분히 담근 뒤 녹색 ‘이태리타월’로 빡빡 때를 벗기기. 30대 이상이라면 공중목욕탕에서 한번쯤 해봤을 경험이다. 그 시절엔 모르는 사람도 서로 등을 밀어줬고 탈의실에서 담소 나누기도 흔했다. 한때 동네 사랑방 구실까지 했던 공중목욕탕은 이제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중이다. 집집마다 욕조·샤워시설을 갖추고 ‘1인 세신숍’까지 등장하면서 몸을 씻는다는 건 점점 사적인 행위가 돼가고 있다.

“1985년생인 저도 아홉 살 이후 이번 연구 전까진 공중목욕탕에 한번도 안 갔어요. 목욕탕이라는 공간이 점점 사라지니까 이것도 기록해야 할 민속의 주제라고 봤어요. 우리나라의 때밀이 문화가 유별나고, 관련한 관광상품도 있을 정도라 이런 목욕 문화는 어디서 유래했나 알고 싶었죠.”

최근 대중학술서 『씻는다는 것의 역사』(현암사)를 펴낸 이인혜 전 국립민속박물관(이하 박물관) 학예연구사의 말이다. 인류학 박사과정까지 수료한 그는 박물관에 근무하던 2019년 2년 여의 문헌·현장 조사를 담아 『목욕탕: 목욕으로 보는 한국의 생활문화』라는 보고서를 냈다. 2023년 박물관 퇴사 후 보고서의 주제의식을 확장해 신간엔 고대 그리스부터 21세기 한국까지 목욕 문화의 변천과 의미를 두루 담았다. 지난 14일 박물관 야외의 옛날 목욕탕 재현 건물 앞에서 만난 그는 “전국 목욕탕 200여곳을 발품 팔아 조사하면서 하루 두세 번 때를 미는 바람에 이젠 목욕탕을 갈 수 없는 피부가 됐다”며 씁쓰레 웃었다.

고대 로마의 유적지인 에페소스(현재는 튀르키예에 속함)의 공중목욕탕 흔적. 중앙포토

3부로 구성된 책에서 1부는 고대 로마의 공중목욕탕 ‘테르마이’ 등을 포함한 세계 목욕의 역사를 다룬다. 2부는 삼국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한국의 목욕문화, 3부는 공중목욕탕을 중심으로 본 현대 한국사회를 들여다본다. 특히 2부에서 구한말~일제강점기에 ‘목욕=위생’의 관념이 도입된 시기를 균형 있게 다룬 대목이 돋보인다. 조선시대 온천욕을 즐긴 왕들은 물론, 단오 세시풍속에 이르기까지 세신을 즐겼던 한국인들인데 일제에 의해 ‘더럽고 게으른 민족’으로 치부된 이유가 뭘까.

“애초 씻는다는 것엔 청결 이외에도 속죄, 종교의식, 사교활동 등 다양한 맥락이 있는데 근대 들어 세균과 질병의 관계가 드러나면서 ‘위생’ 측면이 가장 두드러지게 돼요. 씻고 안 씻고가 문명-미개를 가르죠. 서구로부터 이런 관념을 먼저 수용한 제국주의 일본은 우월한 시선에서 식민지 조선인을 차별적으로 다루게 됩니다.”

잘 씻기 위해선 씻을 시설이 충분해야 한다. 문제는 당시 한반도에선 일본인이 모여 사는 곳 우선으로 상수도가 깔리고 목욕탕이 집중 설치됐다는 점이다. 점차 조선인들도 도시를 중심으로 공중목욕탕을 개업했지만 일반인이 드나들긴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신식 공간에 익숙하지 않은 조선인들이 목욕 예절을 종종 어기는 것도 골칫거리였다. “일제는 위생을 모두의 의무로 선전했지만 실상은 목욕탕이 있는 거주지에 살면서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이들만 ‘문명인’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240쪽)

2016년 부산 수영구의 대중목용탕인 광민탕 폐업을 앞두고 이곳의 단골이던 사진작가 손대광씨의 사진전'다 때가 있다'가 열렸다. 광민탕에서 촬영한 7천장의 중 선별한 80여점 가운데 하나다. 중앙포토.

한국 관광상품이 된 이태리타월. 사진 이인혜

해방이 되고서도 열악한 인프라는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전쟁 후 도시로 인구 집중이 심화하면서 주택 부족, 교통 혼잡, 빈곤 등과 함께 위생시설 부족이 큰 문제가 됐다. “목욕료는 여전히 비쌌고 한번 가면 1~2주 쌓인 때를 씻어내야 했으니 특유의 때밀이 문화가 성행한 것 아니겠느냐”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1960년대 말 발명된 때수건, 일명 ‘이태리타월’과 함께 이 같은 습관이 더욱 확산했다. 직업으로서의 세신사, 속칭 때밀이가 등장한 것도 이즈음이다.

1960년 146곳이던 서울의 공중목욕탕은 88서울올림픽을 앞둔 1985년 1768곳으로 급증했다. 대도시 위주로 상하수도 기반 시설이 갖춰지면서 민간의 목욕탕사업이 붐을 이룬 게 컸다. 상대적으로 열악했던 농어촌은 70년대 새마을운동을 거치면서 정부 지원금과 마을 공동기금, 주민들의 노동력을 토대로 ‘새마을 목욕탕’이 보급됐다. 이런 목욕탕은 정미소·이발소와 같은 다른 필수 기반 시설과 함께 마을 공동시설로 자리매김했다. 어차피 집에선 씻기 어려웠으니 알몸 상태로 타인과 한 공간에 함께 있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씻는다는 것의 역사'를 펴낸 이인혜 전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사가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 추억의 거리 ‘장수탕’에서 인터뷰를 위해 익살스러운 포즈를 취했다. 김성룡 기자

“점차 주택 개량이 이뤄지고 상하수도 설비, 기름보일러 등이 도입되면서 개별 가정에도 욕실이 들어섭니다. 특히 아파트에서 비교적 저렴한 관리비로 온수 목욕이 원활해지면서 점차 샤워는 집에서 하는 것이란 인식이 확산해요. 몸을 씻는 건 변함 없지만 언제 어디서 하느냐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죠.”

특히 코로나19 이후 공중위생 의식이 민감해지면서 목욕탕은 물론, 유사품인 찜질방까지 꺼리는 분위기다. 오래된 굴뚝에서 연기를 뿜는 목욕탕이 주택가나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는 데 눈살 찌푸리는 이들도 많다. 그럼에도 저자는 “씻는 시설이 부족한 1인가구, 취약 노령 및 빈민층의 복지를 생각해서라도 공중목욕탕은 일정하게 유지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와 별개로 레트로 열풍 속에 목욕탕 건물이 용도를 바꿔 미술관·카페·식당으로 변화하는 트렌드도 책에서 만날 수 있다.

“가장 사적인 몸에 대한 관심이 목욕문화 전반으로 이어졌는데, 작은 일상에 담긴 거대한 변화를 계속 탐구하려고 해요. 앞으로는 몸이 좀 덜 고생하는 연구를 하고 싶습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