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사라질듯 영원한 ‘정년이’들…여성 국극엔 정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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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 춘향전’ 공연에 출연한 여성국극 1~3세대 배우들. 가운데 앉은 이가 드라마 ‘정년이’의 실제모델 조영숙 명인이다. [사진 시네마 달]

드라마 ‘정년이’(2024, tvN) 덕분에 1950년대를 풍미했던 여성국극에 대한 관심이 커졌지만, 현실은 여전히 척박하다.

‘정년이’의 실제 모델로 75년째 여성국극을 지키고 있는 조영숙(91) 명인 등 1세대 배우는 몇명 남지 않았고, 대를 이어갈 젊은 배우 또한 손에 꼽을 정도다.

다큐멘터리 ‘여성국극 끊어질 듯 이어지고 사라질 듯 영원하다’(19일 개봉)는 여성국극의 이같은 현실을 조명한 작품이다. 힘겹게 여성국극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조 명인의 제자 황지영(32)과 박수빈(40)이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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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이’ 인기에도 불구하고, 여성국극은 여전히 안 팔리는 장르다. 캠핑카로 이동하는 이들의 무대는 주로 지역 축제나 양로원, 노인정, 교도소다. 공연이라기보다는 일회성 행사에 가깝다. 작은 무대라도 오르기 위해 제작진에 읍소하고, 몇명 안되는 관객 앞에서 공연할 때도 많지만, 이들은 여성국극을 떠나지 않는다. 데뷔작인 판소리 다큐 ‘수궁’(2023)에 이어 이 다큐를 연출한 유수연(48·사진) 감독은 궁금했다고 한다. ‘다른 길도 있을 텐데 이들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지난 14일 서울 용산의 한 극장에서 만난 유 감독은 “이 작품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말했다. 다큐는 93세부터 93년생까지 1·2·3세대 여성국극인들이 함께 ‘레전드 춘향전’(2023) 무대를 만드는 과정을 담아냈다. 스승 조 명인이 돌아가시기 전, 꼭 기념비적인 무대를 만들고 싶다며 주인공들이 기획한 공연이다. 다음은 유 감독과의 일문일답.

사비를 털어 제작했다고.
“조 명인과 이소자(95) 선생님 등 1세대 배우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다큐를 보여드리고 싶었다. 2억 5000만원의 제작비를 대느라 아파트 담보 대출을 받다가 부부 싸움까지 했다. ‘정년이’를 계기로 여성국극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니 때를 놓쳐선 안된다는 조급함도 있었다.”
판소리 다큐에 이어 여성 국극 다큐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지키려는 사람들에 관심이 많다. 그 과정을 기록하고 싶었다. 수빈의 말대로 ‘예술은 과묵한 노동’이다. 조 명인은 삶이 역사인 분이다. 70년 넘게 무대에 섰기에 대사 없이도 전신에서 발화되는 게 있다. 그게 기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다.”

다큐에서 주인공들은 객석이 텅 비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모객까지 하지만,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 게 쉽지는 않다. 공연 중 등 돌리고 나가는 관객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기죽지 않고, 온갖 끼를 부리며 흥겨운 무대를 만들어낸다.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에 다카라즈카(1913년 창단한 일본 여성가극단) 공연을 보러 일본에 가기도 했다.

다카라즈카 공연을 보고 주인공들이 많이 부러워하더라.
“모든 게 완벽했다. 평일 오전에도 2000석 규모 대극장이 꽉 찰 정도였다. 답을 찾으러 왔는데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수빈은 ‘한 번 만이라도 이런 데서 공연하고 싶다’고 했다.”
여성국극은 왜 쇠퇴했나.
“전통과 현대의 공존을 꾀한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소리를 탄압한 일제에 이어 광복 후 정부도 국악을 뒷전으로 생각했다. 여성국극 배우들이 기생, 변태, 마약중독자로 매도당하기도 했다. 여성국극의 국가유산 지정과 공연 지원, 후진 양성이 시급하다.”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여성국극을 놓지 못하는 이유를 묻는 감독의 질문에 수빈은 “평생 자기의 존재를 증명해 온 여성국극이 나를 닮아서”라고 답한다.

어떻게든 무대에 오르려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간절함이 느껴진다.
“스승과 선배에 대한 존경, 그리고 관객의 갈채를 못 잊는 것 같다. 죽을 때까지 여성국극을 못 끊을 것 같다는 말에 울컥 했다. 공연을 통해 번 돈을 무대에 다 쏟아붓고도 모자라 빚까지 지는 그들이다.”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했나.
“여성국극이 알려지긴 했지만, 공연하자고 연락 오는 곳은 여전히 없다. 아직도 소리꾼과 관객의 접점이 없는 상태다. 오장육부에서 나오는 소리를 직접 들으면 소름이 돋는다. 다큐가 소리꾼과 관객을 이어주는 통로가 됐으면 좋겠다.”
다음 계획은 뭔가.
“시대를 풍미한 여성국극인데,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여성국극의 유행은 가장 밑바닥에 있던 이들이 가장 위에 있던 사람들을 공연으로 불러낸 문화혁명적 사건이다. 관련한 사진, 팸플릿 등 아무거나 좋으니 보내주시면 좋겠다. 아카이빙 차원에서 여성국극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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