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60년간 못 채운 어부의 꿈, 현실은 아직도 파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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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 연극 대표작으로 꼽히는 ‘만선’은 수탈 당하는 어민의 비극적 삶을 그렸다. 어부 곰치는 아들 셋을 바다에서 잃는다. [사진 국립극단]
“나는 고집 부리는 것이 아니다. 조부님이 그러셨어. 만선이 아니면 노 잡지 말라고. 그물을 손에서 놓는 날에는 차라리 배를 가르고 말 것이여.”
‘흙수저’ 어부 곰치는 오늘도 만선을 꿈꾸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악덕 선주 임제순은 곰치가 잡은 부서(보구치)를 고리대금 이자로 떼 가고, 급기야 남은 원금을 청산할 때까지 배를 빌려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또 다른 선주 범쇠는 곰치의 딸 슬슬이를 후처로 내주면 빚을 갚아주겠다며 곰치 가족에게 접근하고, 궁지에 몰린 곰치는 모든 재산을 다 거는 조건으로 어렵게 배를 띄운다.
지난 6일 개막한 국립극단 연극 ‘만선’(연출 심재찬)은 1964년 처음 세상에 나온 환갑을 넘긴 작품이지만, 2025년에도 여전히 관객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국립극단은 재연 공연을 자주 올리지 않지만 만선은 예외적으로 2021년, 2023년, 2025년까지 세 차례 무대에 오르며 국립극단의 메가 히트작인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스카팽’과 함께 ‘효자 3부작’이라 불릴 정도로 꾸준한 인기를 이어갔다.
전문가들은 만선의 인기 비결로 동시대성을 꼽는다. 현실과 억척스럽게 싸우는 60년대 어부 이야기지만 계급 갈등과 빈부 격차, 신기술을 도입하려는 젊은 세대와 옛 어획 방식을 고집하는 구세대의 갈등(신구갈등)이 지금 관객들에게도 가 닿는다는 평이다.
극 중 곰치의 아들 도삼은 “외국 사람들은 레이더로 물 속에 있는 고기를 다 보고 비행기로 날씨도 탐지한다”고 아버지에게 말한다. 하지만 곰치는 “뱃놈이 물을 무서워하면 안 된다”라며 아들의 말을 무시한다. 노련한 ‘뱃놈’ 곰치는 선조로부터 배운 자신의 기술로 만선을 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매일 고된 뱃일을 하며 힘들게 건져 올린 생선을 선주에게 바치는 곰치 가족의 생활상도 연민을 자아낸다. 선주에게 뱃삯과 이자를 주고 나면 남는 게 없어 원금도 갚지 못하고, 배를 띄우지 못하는 날에는 빚이 속절없이 불어난다. 윤진현 연극평론가는 “‘만선’은 발버둥 치는 흙수저의 이야기”라며 “가진 게 없는 이가 불리한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이 시대를 뛰어넘어 공감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60년전 원작을 각색해 여성 캐릭터를 주체적으로 표현한 점도 플러스 요소다. 슬슬이는 자신을 후처로 들이려는 범쇠에게 정면으로 맞서고, 곰치의 아내 구포댁 역시 고집스러운 남편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심재찬 연출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번 공연에서는 도삼과 슬슬이 같은 젊은 세대들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부각하기 위해 이들 캐릭터의 비중을 늘렸다”고 말했다.
극의 하이라이트는 거대한 운명 앞에서 어부가 좌절하는 모습을 그린 압도적인 엔딩 장면. 통상 소리와 조명으로만 비바람을 연출하는 대부분의 연극과 달리 ‘만선’은 무대 위에 물 5t을 뿌리고 강풍기와 서큘레이터로 바람을 일으키며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를 표현했다. 무대는 제31회 이해랑연극상 수상자인 디자이너 이태섭의 작품. 부서진 난파선처럼 보이는 기울어진 무대와 스산한 조명이 어우러져 위태로운 적막감을 극대화한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오는 3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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