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어르신들 산불 쇼크…“현관 비밀번호도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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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악의 산불로 집을 잃은 이경복(70)씨는 경북 의성군 의성읍 의성체육관에 마련된 임시대피소에서 엿새째 머무르고 있다. 지난달 25일 산불에 의성군 단촌면 세촌1리에 있는 이씨의 집은 잿더미가 됐다.

1일 오전 임시대피소에서 만난 이씨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잠을 거의 못 잔다. 정부가 새집을 지어준다고는 하지만 태어나서 평생 살았던 집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며 눈물을 흘렸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부족한 수면 등으로 이씨의 건강은 크게 나빠졌다. 혈압이 현저히 높아졌고 지병인 당뇨병과 대장암 수술 후유증도 심해졌다.

안동시 임하면에 사는 신모(60)씨는 산불 충격으로 인지 능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한다. 신씨는 “대피한 뒤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려고 했는데 갑자기 현관 비밀번호가 생각이 안 났다”며 “점차 나아지고 있는 것 같지만 벌써 치매가 찾아온 것 아닌지 불안하다”고 했다.

지난 22~28일 경북 북부지역을 휩쓴 산불의 피해자는 60대 이상 고령층에 집중돼 있다. 의성과 안동, 청송, 영양, 영덕 등 지역의 고령층 비중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높아서다. 2023년 기준 전국평균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18.6%인 데 반해 의성은 45.5%, 청송은 41.6%, 영양은 41.1%에 달한다.

국립정신건강센터 국가트라우마센터에 따르면 재난을 겪은 노인은 체력이 떨어지고 경제력이 약한 경우가 많아 재난 스트레스를 더욱 크게 받는다. 노화에 따른 뇌의 변화로 우울증이나 치매가 발병할 위험성이 커지고 심리적 충격이 크다. 대피하는 등 급격한 생활 환경의 변화가 있으면 갑자기 환각이나 망상이 생기는 섬망 증상이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 경북도에 따르면 이재민을 대상으로 1일 현재 2425건의 심리치료지원이 이뤄졌다.

정경애 국립부곡병원 영남권트라우마센터 팀장은 “이재민 상당수는 산불 경험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특히 노인의 경우 평생 쓰던 세탁기 사용법도 잊어버리거나 가족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등 극심한 인지 능력 저하를 겪기도 한다”며 “피해 주민들의 괴로움과 트라우마를 최대한 낮추기 위해 전문적인 심리상담 지원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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