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바람결 따라 그리움 실었소…간송미술관 채운 55개 귀한 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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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의 봄 전시 ‘선우풍월扇友風月: 부채, 바람과 달을 함께 나누는 벗’(4.9~5.25)에서 선보이는 조석진-도화유수.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는 말이 있다. 여름엔 부채를 선물하고 겨울엔 달력을 선물하는 풍습으로, ‘철에 맞는 선물’이란 의미도 있다. 선풍기·에어컨이 없던 시절, 부채는 남녀노소에게 시원한 바람을 선사했을뿐더러 사대부에겐 품위와 풍류를 드러내는 소품이기도 했다. 이런 부채에 그림이나 글씨를 그려 서로 품평하는 문화가 선면화(扇面畵·부채그림)라는 장르를 낳았다. 사각형 화폭이 아니라 ‘부채꼴’ 방사형에 산수와 동·식물, 인물을 그려 넣으니 개성적인 구도와 화풍이 돋보일 수밖에 없다.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부채그림만 한데 모은 ‘선우풍월(扇友風月): 부채, 바람과 달을 함께 나누는 벗’ 전시를 오는 9일부터 5월25일까지 연다. 선면서화만 따로 모은 전시는 1977년 5월 미술관 개관 6주년 기념전 이후 48년 만이다. 전시작품 54건55점 가운데 23건23점은 처음 공개된다. 7일 언론공개회에서 전인건 관장은 “(전시공간인) 보화각 수리·복원을 위해 수장품을 이동·정리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조명된 작품들이 많은데, 이 중에 부채그림이라는 형식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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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의 봄 전시 ‘선우풍월扇友風月: 부채, 바람과 달을 함께 나누는 벗’(4.9~5.25)에서 선보이는 김정희-지란병분.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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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의 봄 전시 ‘선우풍월扇友風月: 부채, 바람과 달을 함께 나누는 벗’(4.9~5.25)에서 선보이는 섭지선-청죽.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이 가운데 눈에 띄는 게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존재감이다. 서체인 추사체는 물론이요 남종화풍의 간결한 산수화와 묵란화에 능했던 추사는 다수의 부채그림과 글씨를 남겼다.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수집한 선면 서화 총 133건 가운데 조선 55건의 절반 가까운 21건이 추사 작품이다. 전시엔 ‘중청람란’과 ‘지란병분’ 등 2점만 나왔지만 2층을 채운 조선과 청나라 선면화 24건(25점) 다수가 추사와 직·간접 인연이 있다.

가령 청나라 학자 섭지선(1779~1863)의 ‘청죽’은 절제된 붓질로 바람에 한들거리는 푸른 댓잎을 그려 문인화가 홍현주(1793~1865)에게 선물한 작품이다. 조선 22대 임금 정조의 부마(공주의 남편)로서 홍현주는 추사를 비롯해 연행(燕行, 중국 연경에 사신이나 수행원으로 다녀옴)했던 이들과 교류가 깊었는데 이 경로로 섭지선과 돈독한 친교를 맺었다. 한여름 더위를 식히라고 이국에서 그려 보낸 대나무 그림에 국경을 뛰어넘는 우정이 배어난다.

조선 말기 여항문인으로 이름난 조희룡(1789~1866)의 사뭇 다른 두 작품 ‘난생유분’과 ‘분분청란’도 눈길을 끈다. 전자는 추사의 영향을 받아 단정하게 난잎을 표현했지만 후자는 사방으로 흩날리는 난꽃까지 더해져 마치 들풀처럼 생명력이 느껴진다. 김영욱 전시교육팀장은 “조희룡은 추사가 예송논쟁으로 유배당할 때 함께 휘말리는데, 이 유배 시점 전후로 자신만의 화풍이 뚜렷해진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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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의 봄 전시 ‘선우풍월扇友風月: 부채, 바람과 달을 함께 나누는 벗’(4.9~5.25)에서 선보이는 김홍도-기려원류.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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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에서 열린 특별전 '선우풍월(扇友風月): 부채, 바람과 달을 함께 나누는 벗'에서 관람객들이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부채 그림과 부채 글씨를 통해 간송 컬렉션의 서화를 '형식'이라는 주제로 풀어낸 이번 전시에서는 총 133점의 선면 서화 중 엄선된 54건 55점의 대표작품을 처음으로 해제하여 선보인다. 연합뉴스

추사와 함께 간송 초기 컬렉션의 중심이었던 겸재 정선(1676~1759)의 작품은 이번에 빠졌다. 간송 측은 총 4점의 겸재 선면화를 소장하고 있는데 이 중 ‘도산서원’이 현재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겸재 정선’에 전시되고 있다.

산수를 담은 선면화 중엔 중국의 명승이나 관념 속 이상향을 담은 그림이 두드러진다. 진재 한용간(1783~1829)이 중국 항주의 서호 풍경을 그린 ‘서호육교’와 혜천 윤정(1809~?)이 중국 강남 지방의 절경을 그린 ‘삼오팔경’은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1층은 안중식·조석진·이상범·변관식·이도영 등 20세기 초 근대 서화가들의 부채그림 25건25점이 모였다. 이들 다수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교육기관인 서화미술회 혹은 최초의 미술인 단체인 서화협회에서 활동했다. 조선 선면화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개성 있는 구도와 소재가 눈길을 끈다. 김영욱 팀장은 “지난해 발견된 간송의 구입일지 『일기대장』 등을 통해 간송이 서화협회 전시를 매년 후원하고 회원들 작품을 꾸준히 구입했음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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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에서 열린 특별전 '선우풍월(扇友風月): 부채, 바람과 달을 함께 나누는 벗'에서 관람객들이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부채 그림과 부채 글씨를 통해 간송 컬렉션의 서화를 '형식'이라는 주제로 풀어낸 이번 전시에서는 총 133점의 선면 서화 중 엄선된 54건 55점의 대표작품을 처음으로 해제하여 선보인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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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에서 열린 특별전 '선우풍월(扇友風月): 부채, 바람과 달을 함께 나누는 벗'에 김정희의 '지란병분'이 전시되어 있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부채 그림과 부채 글씨를 통해 간송 컬렉션의 서화를 '형식'이라는 주제로 풀어낸 이번 전시에서는 총 133점의 선면 서화 중 엄선된 54건 55점의 대표작품을 처음으로 해제하여 선보인다. 연합뉴스

이번 전시는 지난해 봄 보화각 재개관전을 시작으로 내년까지 이어지는 ‘간송 컬렉션 재조명’ 3개년 계획의 세 번째 기획전이기도 하다. 미술관 측은 국보·보물 42건 207점을 포함해 1만점이 훌쩍 넘는 간송컬렉션의 형성 과정을 체계적으로 되짚어보고 있다. 김영욱 팀장은 “오는 가을 전시는 컬렉션의 ‘국적’을, 내년 전시는 ‘구입’과 ‘수장’을 중심으로 살펴볼 계획”이라고 예고했다.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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