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산 힘써야할 때, 물건 이리저리 옮겨 이득 취하는 소인들 [김성칠의 해방일기(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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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칠 교수의 일기는 1993년 〈역사 앞에서〉란 제목으로 창비에서 출간됐다. 이 일기는 1945년 11월 29일자 뒤쪽부터 남아 있었는데, 그 앞의 일기가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유물을 보관하고 있던 필자의 아들 김기목(통계학·전 고려대) 교수가 사라진 줄 알았던 일기를 최근 찾아냈다. 1945년 8월 16일에서 11월 29일(앞쪽)까지 들어 있다. 중앙일보는 이 일기를 매주 토요일 원본 이미지를 곁들여 연재한다. 필자의 다른 아들 김기협(역사학) 박사가 필요한 곳에 간략한 설명을 붙인다.

10월 22일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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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활자 이야기.

학교에 가선 3-4학년 반에 전래동화 이상한 연적(아동문학집)을 읽어 듣겨주었다.

구휼사업은 어제로써 꼭 한 달을 계속하였다. 그동안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해 나온 직원들의 끈기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내가 할 말은 아닐는지 모르나 오늘날 모든 조선사람이 이 사람들처럼 열성과 끈기를 가진다면 조선의 새 건설은 잘 되어가리라고 믿는 바이다.

오늘부터 주먹밥을 해주기로 하고 밥 짓는 일과 주먹밥 만드는 일은 모두 여자 사무원들의 수고를 빌리기로 하다. 또 한 가지 난점은 봉양역에서 워낙 정차 시간도 적고 또 붐비어서 과연 시장한 전재자(戰災者)가 누군지 식별해서 나눠주기 힘들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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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봉양역에서
전재 귀환동포를 위하여
주먹밥을 준비하였사오니
이재동포가 차창에서 받을 수 있도록
이 종이쪽을 받으신 분이
차내에 두루 알려주시옵소서”

하는 삐라를 써서 구학역에 갖다 승객들에게 나눠주기로 하였다. 이걸 부탁하러 두 시 차로 구학엘 갔더니 역장은 상경 부재중이고 대리로 일보는 사람이 쾌히 맡아주기로 하였다.

오랜만에 구학공원엘 갔더니 만산홍엽 속에 폭포의 흰 비말이 조영(照映)하여 소조한 중에도 아늑한 기분을 자아내게 하였다. 혼자 거닐기 멋쩍고 해서 곧 내려와 버리었다.

이승만 박사께서 이 달 16일에 귀국하시었다는 신문을 보았다.

10월 23일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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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조선(兒時朝鮮)〉(육당)을 다 읽다. 조선상고사의 윤곽이 뚜렷이 알려지는 좋은 글이었다. 육당(六堂) 독특한 언어 분석과 그 견강부회로 이루어진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엔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점이 많으나 대체로 보아서 훌륭한 노작(努作)이었다.

아침은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의 〈건건록(蹇蹇錄)〉을 기초로 하고 일청전쟁의 발화점에 대하여 이야기하다.

[해설 : 메이지 초기 사상가-정치가였던 무쓰 무네미쓰(xxxx-xxxx)가 외무대신으로 재직하며 청일전쟁 상황을 논한 〈건건록〉은 비밀문서를 많이 이용한 글이라서 1929년에야 공개되었다.]

오후엔 비루박달 가서 김장거리 부탁하고 윤 학자님을 찾아뵙다.

10월 24일 개다.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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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사육신 이야기.

조합장 환갑이라고 해서 그 집에 가서 아침 먹다.

내일 연합회에서 회의가 있다기 유의순 서기를 대행(代行)시키고 조병순(趙炳純), 임달선(林達善) 양씨에게 편지하다.

오후엔 뜻밖에 강경석 군이 내방. 거의 두 해 만에 이제 새 세상이 되어서 그를 맞으니 감개무량하다. 장래의 진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

10월 25일 개다. [된서리 얼음 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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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유난히 추운 것 같더니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지붕에 서리 뽀-얗게 나리었고 파초잎이 삶아놓은 것 같이 변색해서 축 늘어지고 뜰앞 축산(築山)에 단풍 가지가 피를 뿜는 듯 더욱 붉어졌다.

아침엔 조선 천주교 이야기.

부평의 이병흔(李炳欣) 씨가 와서 백운면 산 계약이 무사히 해결되었다고. 강 군과 함께 구학역 가서 이 씨 일행의 차표 사주고 구학공원을 둘러보다.

낮차로 원주 가서 내일 강의 보고 서울까지 다녀오렸더니 고단하기도 하고 또 마침 내일이 아내의 생일이기에 여행을 중지하다.

오후엔 김상호 씨가 청년 대표 김광렬(金光烈) 씨를 데리고 와서 기어이 제천 나와서 청년회를 지도해 달라는 부탁. 딱한 노릇이다.

10월 26일 개다. (9. 21) [아내의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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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엔 헤이그 밀사사건과 이준(李儁) 선생 이야기.

강경석 벗과 현철 군 데리고 미당리를 거쳐 의림지에. 좋은 늦가을 날씨였다.

봉양리에서 미당리를 거쳐 신월리로 해서 제천읍으로 들어가는 길은 옛날의 국도로서 지금도 그 노폭이 상당히 넓은데 노면은 울툭불툭하고 잡초가 자랄 대로 자랐다. 사람도 아무리 훌륭한 바탕을 지니고 또 한때 중요한 일을 했달지라도 항상 마음의 수련을 하지 않으면 그 마음속이 이 폐로와 같이 쑥밭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청년은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도 교문을 나온 후론 다시 정신적인 향상을 희구하지 않고 이기주의적인 사리(私利)의 추구와 퇴폐적인 향락만을 일삼아서 마침내 마음의 황무지와 폐로를 이룩하는 것이 유감스런 현상이라 했더니 강 군이 그건 조선 청년의 잘못이 아니고 일본 교육이 그리 만든 것이라고. 또 너무도 절망적인 사회현상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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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장영복(張永福)의 말이 지금 서울은 쌀 한 말(五升斗)에 30원이고 제천은 40원씩이니 제천서 누가 35원씩에 쌀 한 차를 맡겠다고 계약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곧 청량리로 달려가서 한 차 실어 내리겠다고, 그러면 2천원은 남겠다 하였다. 오늘날 조선사람이 다만 적은 물건 하나라도 더 생산하기에 힘써야지 가뜩이나 부족한 물건을 이리저리 옮겨서 그 중간에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될 터인데 현실은 이와 상반하여 그 때문에 물가는 날로 오르고 교통 기타의 사회기관은 혼란을 극하고 있음이 아닐까. 그런 중에도 서울의 쌀을 오늘날처럼 핍박한 운수력을 이용해서 시골로 가져 내려와서 모리(謀利)의 도구로 삼으려고 하는 것은 지극히 한심스러운 가장 악랄한 이욕의 추구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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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은 하는 수 없는 동물이다. 그는 8월 15일 이후에도 경찰력의 진공 상태를 이용하여 채표(彩票) 비슷한 행위를 하였다고 한다. 개인의 요행심과 사리심(射利心), 도박성 등에 편승해서 정상적인 생업에의 집착심을 저해하는 만인계(萬人契)를 설시(設施)하는 그의 소행은 가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송연환(宋然煥)을 찾아서 기봉이의 송아지를 보았다. 아주 조그만 귀여운 누른 암송아지였다.

이양규(李養圭) 씨를 찾아가서 시조도 듣고 가야금 타는 소리도 들었다. 삶은 밤과 점심 대접을 받고 〈필사본의 원류〉와 〈진견록건(晉見錄乾)〉의 두 권 책을 빌려서 그 집을 나섰다. 또 한 가지 〈풍수학의 곤여상설(坤輿象說)〉이란 책 있음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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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씨는 음악을 좋아하고 수예에 다능(多能)한 분인데 이 마을엔 이 씨 외에 최병현(崔炳鉉)이라는 이 씨보다도 더 그 방면에 다예(多藝)한 분이 있다 하여 한 번 만나보려고 했으나 강릉 지방으로 출타 중이라 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오늘날 생산의 필요함은 췌언(贅言)을 불요하거니와 더욱이 수공예의 업에 있어서 그러하고 또 조선사람은 과거에 있어서 청자니 비거(飛車)니 하는 좋은 천재의 싹이 있었으나 그런 것이 전승되지 않아서 문화의 줄기를 세우지 못했음은 무엇보다도 유감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이 노인들의 수예의 재(才)를 후진 청년에게 전승할 수 있도록 응분의 획책을 하고자 하는 바이다. 이로써 일방의 생산을 일으키고 또 숨은 천재를 찾아내어서 북돋워주는 기연(機緣)이 되면 무엇보다도 다행한 일일 것이다.

길에서 강 군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그의 양심적인 마음의 금선(琴線)에 닿으며 내 가슴에 이상스러운 감회가 용솟음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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