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신혼부부 나무심기 40년... 자작나무 쓰러진 자리에 다시 숲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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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킴벌리 '신혼부부 나무심기'
“비료 너무 많이 넣는 거 아니야?” “잠깐, 여기 돌 있어. 내가 뺄게.” “다 심었다! 소원 빌까? 다음 세대를 위하여! 맑은 공기를 위하여!”
지난 12일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의 자작나무숲에 모인 신혼부부들은 2인 1조로 바쁘게 움직였다.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은행나무 묘목 30그루 심기. 한 명이 괭이로 땅을 파면 한 명은 양손 가득 비료를 구덩이에 넣었다. 같은 자리에 묘목을 수직으로 세운 다음 흙을 다시 채우고 두 손으로 꾹꾹 눌렀다. 이날 심은 20cm짜리 묘목이 자라 울창한 숲을 이루기까지는 30년이 걸린다. 아내 국서정(32)씨와 함께 온 성주한(33)씨는 "아이가 서른 살이 됐을 때 함께 다시 와볼 생각"이라며 "결혼생활을 하다보면 다툴 일도 많겠지만, 여기 나무와 함께 심어 둔 신혼 때의 마음을 떠올리면서 잘 살고 싶다"고 했다.

지난 12일 강원 인제 자작나무숲에서 열린 ‘신혼부부 나무심기’ 프로그램 참가자들. 유한킴벌리는 ‘우리강산 푸르게푸르게’ 캠페인의 일환으로 신혼부부 나무심기 프로그램을 41년째 운영하고 있다. [사진 유한킴벌리]
신혼부부들을 숲으로 불러모은 건 유한킴벌리다. 유한킴벌리는 국내 최장수 숲환경 공익 캠페인 '우리강산 푸르게푸르게' 사업의 일환으로 1985년부터 올해로 41년째 '신혼부부 나무심기' 행사를 주최하고 있다. 결혼 3년 이내 신혼부부나 결혼을 확정한 예비부부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기후변화와 산불 이슈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프로그램 인기도 매년 높아지고 있다. 올해는 역대 최고 경쟁률인 21대 1을 기록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선정된 신혼부부 106쌍과 유한킴벌리 임직원, 협력기관인 생명의숲, 산림청, 인제군 관계자 350명이 이날 행사에 함께했다.
누적 참여 6만 명, 대(代)를 잇는 참여 확산
참가자들이 방문한 곳은 한때 약 70만 그루의 자작나무가 숲을 이뤘던 구역이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자작나무들이 빼곡하던 이곳에 2023년 12월 갑작스러운 폭설이 내렸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습설'이었다. 온난화로 대기 중 수증기량이 늘면서 내리는 습설은 마른 눈보다 2~3배 더 무겁다. 이 눈은 자작나무 가지마다 두껍게 쌓였다. 연어이 찾아온 강추위는 눈을 얼렸고,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무는 바닥을 향해 고꾸라졌다. 산림청은 회생 불가능한 자작나무들을 모두 베어냈다.
행사에 참가한 고용희(33)ᐧ박영선(37)씨 부부에게 자작나무숲은 특별한 추억이 남아있는 곳이었다. 박씨는 "7년 전 연애를 막 시작했을 때 여행을 왔었다"며 "여기서 서로에 대한 믿음이 커져 결혼까지 하게 됐다"고 했다. "그땐 자작나무의 풍경이 참 멋졌는데 이렇게 황량해진 모습을 보니까 속상해요. 기후변화가 많은 것을 바꾸고 있다는 게 실감돼요. 우리를 맺어준 주선자에게 양복 한 벌 해준다는 마음으로 나무를 심고 있어요(웃음)."

올해 ‘신혼부부 나무심기’에는 신혼부부 106쌍, 유한킴벌리 임직원, 생명의숲·산림청·인제군 관계자 350여 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훼손된 자작나무가 잘려나간 자리에 은행나무 4500그루를 심었다. [사진 유한킴벌리]
신혼부부들은 이날 1만5000㎡ 면적에 3년생 은행나무 묘목 4500그루를 심었다. 남은 자작나무들 사이에 자리잡게 될 은행나무는 산사태, 병충해 등 피해를 막는 방재수 역할을 할 수 있다. 유한킴벌리는 2027년까지 생명의숲, 산림청과 협력해 인제 자작나무숲 결빙 피해지 일대 3만4000㎡에 은행나무와 박달나무, 신나무 등 약 1만 그루를 심고 가꾼다는 계획이다.
지난 40여 년간 '신혼부부 나무심기' 누적 참가자 수는 약 6만 명. 이들은 전국에 25만 그루 넘는 나무를 심었다. 한 사업이 오랜 기간 이어지면서 예전에 참가했던 신혼부부의 자녀가 대를 이어 참여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권용준(34)씨는 35년 전 참여했던 아버지의 추천으로 신청서를 냈다. 권씨가 처음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아버지는 며느리인 남정화(33)씨에게 재차 권유했다고 한다. 권씨는 "결국 아내 손에 이끌려 참가하게 됐는데, 직접 와보니 기대 이상으로 의미있고 재미도 있다"며 "나중에 태어날 아이에게도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추천해주고 싶다"고 했다.

2015년 신혼부부로 나무심기 행사에 참여했던 장운기(41)ᐧ이진선(39)씨 부부는 올해 아들 장다온(9) 군과 다시 현장을 찾았다. 왼쪽 사진은 10년 전 부부가 처음 나무를 심었을 당시 모습. [사진 유한킴벌리]
기존 참가자들은 결혼 후 3년이 지나도 아이와 함께라면 한 번 더 참여할 수 있다. 2015년에 참여했던 장운기(41)ᐧ이진선(39)씨 부부는 올해는 아들 장다온(9)군과 함께했다. 이진선씨는 “당시엔 둘이서 경기도 양평군에 잣나무 5그루를 심었는데 올해는 셋이서 18그루나 심었다”며 “둘보다는 셋이 함께 하니 낫다”며 웃었다. 다온군도 처음 나무를 심으며 신이 났다. “아빠가 괭이질을 하고 엄마랑 제가 비료를 넣었어요. 나무한테 잘 크라고 인사도 했어요. 저도 엄마 나이 되면 아기 데리고 새로운 나무 심으러 올 거예요.”
나무심기를 마치고 40분을 걸어 도착한 자작나무숲 숲속놀이터에서는 간단한 레크리에이션과 깜짝 프로포즈 이벤트가 진행됐다. 미국에 있는 시부모님과의 거리 때문에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변영은(39)씨는 이날 남편 트리스틴 그렐 코왈스키(37)씨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또 다른 부부인 이한빈(30)씨는 남편 최동환(33)씨에게 그동안 고마웠던 마음을 담아 '리마인드 프로포즈'를 했다. "반복되는 야근과 쏟아지는 업무 속에서 웃음을 잃어가는 남편에게 특별한 하루를 선물해주고 싶었어요. 여보, 우리도 이 나무처럼 단단하게 자라자."
2030년까지 6000만 그루 심는다
'신혼부부 나무심기' 프로그램은 1984년 시작된 국내 최장수 숲 환경 공익 캠페인 ‘우리강산 푸르게푸르게’ 캠페인 사업 중 하나다. 당시 산림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황폐해져 있었다. 산업화로 인한 환경 문제도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었다. 1970년대부터 정부는 산림녹화 사업을 추진했지만 상황은 여전히 열악했다.

자작나무를 벌채한 구역에서 신혼부부들이 2인 1조로 나무를 심고 있다. 한 팀당 할당된 묘목은 15그루. 나무를 심을 자리에는 길다란 막대가 꽂혀 있었다. 비료가 든 흰색 포대도 군데군데 놓여있었다. [사진 유한킴벌리]
유한킴벌리는 '전국에 100만 그루를 심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민간기업 최초로 숲 조성 캠페인을 주도했다. 산림 소유주도, 임엄 전문회사도 아닌 민간기업이 산림녹화 사업에 참여하는 건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다. 유한킴벌리는 숲 조성의 필요성을 알리는 공익광고 캠페인, 임직원 나무심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시민의 참여를 유도했다. 신혼부부는 생명의 소중함을 잘 이해하고, 미래세대를 향한 책임감도 크기 때문에 이 캠페인의 주요 참여층으로 꼽혔다.
시대에 따라 프로그램의 아젠다도 변화했다. 1990년대에는 지역주민의 소득창출이 가능한 잣나무를 주로 심었다. 신혼부부들은 1985년 충북 제천시 백운면을 시작으로 2000년까지 경기 안성, 대전 대덕구 등에 잣나무만 10만3000그루를 심었다. 금강산 관광이 활성화 된 2005~2008년에는 북한으로 갔다. 금강산 산림을 복원하고 북한 주민의 소득원을 마련해주기 위해 밤나무, 잣나무, 구상나무 1만600그루를 식재했다. 최근에는 산불 피해지나 생물다양성이 필요한 지역을 중심으로 나무심기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내년에는 최근 산불 피해를 입은 경북 지역에서 나무심기 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한 참가자가 남편과의 추억이 담긴 사진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주최 측은 레크리에이션이 열린 자작나무숲 숲속놀이터에 참가자들이 제출한 커플 사진을 인화해서 걸어뒀다. [사진 유한킴벌리]
'신혼부부 나무심기' 외에도 유한킴벌리는 ▶︎미래의 환경 리더를 키우는 '그린캠프' ▶︎한국 야생식물 서식 환경 개선을 위한 '밀원 꿀벌숲 조성' ▶︎멸종위기종인 '구상나무 보전원 조성' ▶︎일상의 공간에 숲을 만드는 '도시숲' ▶︎사막화 방지를 위해 몽골에 23년간 11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은 '몽골 유한킴벌리숲'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며 변화하는 환경 이슈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김희웅 유한킴벌리 사회책임워크그룹 부장은 “고등학생으로 참여했던 이들이 대학생이 되어 봉사자로 돌아오고, 결혼 후에는 신혼부부 나무심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등 참여의 선순환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41년간 유한킴벌리가 '우리강산 푸르게푸르게' 캠페인을 통해 국내외에 심고 가꾼 나무는 5700만 그루에 이른다. 숲의 규모로 따지면 1만6500ha로 여의도의 약 60배 크기다. 다음 목표는 2030년까지 누적 6000만 그루를 심는 것이다. 이제훈 유한킴벌리 사장은 “오늘 심은 나무가 10년, 20년 후에는 아이들에게 시원한 그늘과 맑은 공기, 지속가능한 미래를 선물할 것"이라며 "유한킴벌리도 우리나라의 숲과 사람이 지속가능하게 공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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