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향기와 공간이 쓴 순백의 여정 [더 하이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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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천이 대형 건물 전체를 감싸듯 드리워진 공간. 공기의 움직임에 따라 천이 하늘거리며 만들어내는 물결은 디자인 미학으로 무장한 그 어떤 건물보다 화려했다. 지난 3월 27~30일 서울 성수동 XYZ 서울에 마련된 뷰티 브랜드 바이레도(Byredo)의 공간 ‘페이지 블랑쉬(Page Blanche) 서울’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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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7~30일 서울 성수동 XYZ 서울에 마련된 뷰티 브랜드 바이레도(Byredo)의 공간 ‘페이지 블랑쉬(Page Blanche) 서울’의 모습. 사진 바이레도

이곳은 글로벌 패션 뷰티 기업 푸치코리아가 바이레도의 시그니처 향수인‘블랑쉬’의 새로운 라인업 ‘블랑쉬앱솔뤼 드 퍼퓸’ 출시를 기념해 마련한 팝업 전시 공간이다. 공간 디자인을 맡은 건축사무소 서아키텍스는 프랑스어로 ‘흰색’을 의미하는 블랑쉬(Blanche)가 가진 갓 세탁한 침구처럼 깨끗하고 편안한 안식처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흰색 리넨만을 사용해 감각적인 공간을 만들어냈다. 바이레도가 그간 만들어온 감각적인 향이 하나의 예술적 공간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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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레도 블랑쉬 앱솔뤼 드 퍼퓸. 오롯이 향에 집중하는 미니멀한 향수병에 일본 우드버닝 기법에서 영감 받은 검정 캡을 적용했다. 사진 바이레도

기억을 향으로 번역한 향수

2006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시작된 바이레도는 기존 럭셔리 향수 브랜드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향의 본질에 집중하면서도 개인적인 기억 속 감정을 자극하는 독창적인 조향 방식을 추구한다. 향수를 뿌린 사람의 이미지를 부각하기보다 그의 추억과 이야기에 집중한 향을 만든다. 또한 화려한 향수병 대신 장식 없는 투명한 유리병을 선택해 단순하지만, 감각적 미학을 담는다. 이와 같은 기존 향수업계의 틀을 깨는 접근법에 바이레도는 론칭하자마자 헐리우드 스타 등 유명인의 선택을 받으며, 니치향수 업계의 스타가 됐다.
바이레도의 독창성은 창립자 벤 고햄(Ben Gorham)이 지닌 다양한 문화적 경험과 이를 통해 형성된 철학에 뿌리를 둔다. 인도인 어머니와 캐나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토론토·뉴욕·스톡홀름으로 이주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대학엔 경영학 전공으로 진학했지만, 이내 프로 농구선수가 됐고, 선수 생활 후엔 예술대학에 다시 입학해 순수미술을 공부했다. 그는 우연한 계기에 향이 기억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과 감정의 언어’가 될 향수를 만들기로 한다. 이것은 곧 브랜드의 정체성이 됐고 유명 조향사 올리비아 자코베티, 제롬 에피네트 등과 협업해 향수를 단순하게 ‘좋은 향’을 제공하는 제품이 아닌 감각적 경험을 제공하는 물건으로 발전시켰다.
이는 이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브랜드명 바이레도(Byredo)는 ‘By Redolence(향에 의한)’에서 따온 것. 로고 B는 바이레도의 앞 글자인 동시에 벤 고햄의 농구선수 시절 등번호였던 ‘13’을 의미한다. 단순한 향의 나열이 아닌, 기억과 이야기를 담겠다는 그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지금 바이레도는 향수를 넘어 메이크업, 바디케어, 홈 프래그런스 등으로 카테고리를 확장하며 브랜드가 가진 독특한 예술적 감각을 라이프스타일 분야까지 적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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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레도 블랑쉬 앱솔뤼 드 퍼퓸의 캠페인 이미지. 갓 세탁한 리넨 침구에 누워있는 모델의 모습으로 편안함과 휴식, 안정감 등을 표현했다. 사진 바이레도

강렬하게 진화한 순수함

바이레도에게 한국 시장이 갖는 의미는 크다. 글로벌 차원에서 한국은 바이레도의 주요 시장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향수로 보자면 이번 팝업 전시의 주인공이 된 블랑쉬는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제품 중 하나다.
푸치코리아는 이번 팝업을 통해 블랑쉬의 새로운 라인인 ‘블랑쉬앱솔뤼 드 퍼퓸(Blanche Absolu De Parfum)’을 선보였다. 블랑쉬는 맑고 깨끗한 리넨을 연상시키는 향으로, 새로운 앱솔뤼 라인은 이 순수함에 감각적인 강렬함을 가미했다.
향의 처음은 코를 톡 쏘는 듯한 알데하이드와 블랙 페퍼 향으로 시작해, 장미와 제비꽃 향이 느껴진다. 숲의 상쾌한 향을 닮은 앰버 우드와 캐시미어 우드가 포근한 잔향을 남긴다. 부드러움 속에 대담함이 공존하는 구조로, 기존 블랑쉬보다 묵직하고 강렬하다.
보틀 디자인 또한 주목할 만하다. 투명한 유리병은 그대로이지만, 단 하나의 향수병 장식물인 뚜껑은 일본의 전통 기법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것으로 마치 오랜 시간 타고 남은 나무 모양을 하고 있다. 브랜드가 강조하는 미니멀리즘과 럭셔리, 감각적 조형미가 집약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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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미로(The Labyrinth of Thoughts)’ 공간. 관람객의 향에 대한 기억을 종이에 적어 매달아 미로를 완성하는 참여형 설치 작품이다. 사진 바이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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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베개로 채워진 첫 공간 '코튼 속 안식(The Embrace of Cotton)’. 사진 바이레도

순백의 공간에서 감각을 걷다

이번 전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전시 컨셉인 ‘페이지 블랑쉬’는 ‘비어있는 한 페이지’를 의미했다. 전시는 총 세 개의 테마 존으로 공간을 구성해 향과 예술적인 공간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게 했다. 관람객들은 단순한 향수 체험을 넘어, 향이 공간이 되고 기억이 오브제가 되는 감각의 여정을 걸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뻗은 거대한 베개로 채워진 첫 공간 '코튼 속 안식(The Embrace of Cotton)’은 블랑쉬의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방금 세탁한 침대에 몸을 맡기듯 사람들은 이곳에서 베개에 눕기도 뛰어들기도 하며 리넨의 부드러움 속에서 포근한 휴식을 맛봤다.
두 번째 공간 ‘향기, 머무는 기억(Writing the Invisible)’과 마지막 공간 ‘사유의 미로(The Labyrinth of Thoughts)’는 자신의 이야기를 종이에 적어 작품을 완성하는 퍼포먼스에 참여하도록 했다. 특히 사유의 미로에선 향이 가득한 공간에서 기다란 종이가 샹들리에의 크리스털처럼 매달린 미로 설치작품을 함께 만들고, 이 속을 걸으며  향과 관련된 자신의 이야기와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게 했다. 향이 기억되고 기억이 또 다른 창작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함께한 것이다.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향수는 기억의 시”라고 했다. 향은 기억을 불러오고, 그 안의 감정을 다시 느끼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 기억과 감정을 이야기로 담고 있는 바이레도가 강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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