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조선사람은 낙천적"이라는 어느 학자에게 보내는 글 [김성칠의 해방일기(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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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김성칠 교수의 일기는 1993년 〈역사 앞에서〉란 제목으로 창비에서 출간됐다. 이 일기는 1945년 11월 29일자 뒤쪽부터 남아 있었는데, 그 앞의 일기가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유물을 보관하고 있던 필자의 아들 김기목(통계학·전 고려대) 교수가 사라진 줄 알았던 일기를 최근 찾아냈다. 1945년 8월 16일에서 11월 29일(앞쪽)까지 들어 있다. 중앙일보는 이 일기를 매주 토요일 원본 이미지를 곁들여 연재한다. 필자의 다른 아들 김기협(역사학) 박사가 필요한 곳에 간략한 설명을 붙인다.
10월 28일
어떤 학자는 조선사람을 낙천적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는 비극의 연쇄이었으니 낙천적으로 보이는 그 마음속 깊이 바닷물처럼 가없이 넓고 한없이 깊은 슬픔이 깃들이었으리라. 그들은 너무나 가혹한 운명의 질곡을 부둥켜안고 울다가 울다가 지쳐서 거의 생명의 감천(甘泉)이 고갈하려 할 즈음 문득 생각해낸 절망의 철리(哲理)가 낙천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낙천주의는 운명의 파탄을 비끌어매는 밧줄이기는 하나 허허 하고 웃는 그 웃음소리엔 공허한 울림이 있는 것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숙명이리라. 그 웃음의 그늘에 뼈를 어이는 듯한 비애가 사무친 줄 그 누가 알랴.
여기 한 사나이가 있다. 그의 운명의 고삐는 자꾸만 엇나가려 하고 있다. 그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버티고 버티고 했으나 운명의 작희(作戲)는 끝이 없다. 그러나 그는 이를 하늘님이 주시는 시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밀물처럼 밀려오는 슬픔과 애달픔을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켜버린다. 그는 꿈에도 술에 숨으려 하지 않고 아편에 도망하려 하지 않는다. 하늘님이 영 그를 버리시기 전엔 그는 앞으로도 언제나 그러하리라. 겹쳐 닥치는 수난에 가슴속 골골이 눈물이 번지고 가느다란 이성의 싹이 하마 번울[煩鬱]의 또약볕에 시들어 버리려 할 무렵에 그의 머릿속에 해탈자의 영감(靈感)처럼 한 줄기 광명이 빗기었으니 거룩할진저! 낙천주의여. 허허 하고 웃는 그의 웃음 뒤에 만 겹 시름이 첩첩이 쌓이고 쌓이었음을 그 누가 알랴.
방 바꿈을 되물려서 책상을 본시 있던 방으로 옮기고 책을 얼마쯤 간추렸다.
낮에 강 군, 이 군과 더불어 파병암(破甁岩)에 가서 놀다. 이 군을 다섯 시 차로 보내다.
10월 29일 개다.
아침에는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이야기.
수공예품 품평회의 기획을 직원들에게 피력했더니 모두 좋다고 해서 그 취의서를 다음과 같이 얽어 보았다.
”자유와 해방이 이루어졌다고 언제까지든지 기분에만 날뛰고 있을 일이 아니다. 한 가지 물건이라도 생산에 힘써서 조국의 새 건설에 이바지하라.
이러함으로써 모리배의 도량이 억제될 것이며 우려되는 실업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미미한 기획으로 해서 각인의 머릿속에 잠자는 수예의 천분을 눈뜨게 해서 생산에의 의욕을 앙양하고 이를 계기로 하여 숨은 천재가 발천(發闡) 계승되고 조선의 부가 증진된다면 분외의 행일까 한다.“
[심사원 이양규 씨 최병현 씨 김한구 씨 안재봉 씨 박관 씨
출품기한 금년 12. 15
회기(會期) 명년 1. 1 – 1. 5
시상 1등 1인 천원 2등 10인 백원씩]
출품 종목은 우리 땅에서 나는 재료를 써서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물건. Hand Manufacture 의 소산이면 무엇이든지 좋다. 예시하면
표주박, 지팽이, 담뱃대, 안경집,
등잔, 쟁반, 함지, 책꽂이, 사진틀,
쌈지, 소반, 벼룻집, 목침
슬리퍼, 초석(草席), 초석바듸, 둥그미
바가지공예품, 과자그릇,
죽제품, 싸리나무 제품,
짚신, 삼신,
종이통, 부채, 필통
족자, 병풍,
책보, 가방, 핸드백, 륙색,
강 군과 함께 읍엘 갔다 늦게 돌아오다.
이 달 말일부로 내가 움직이게 된다는 소문.
10월 30일 흐리었다 개다.
아침에는 미국 이야기.
이병흔 씨 와서 돈 찾아가지고 낮차로 떠나다.
낮에 김기영(金基泳) 씨가 찾아와서 공전리 장담부락으로 이의(移意)를 가지고 다녀온다기 그가 내 말을 듣고 안 듣는 건 별문제로 하고 아는 터수에 말하지 않을 수 없노라 하고 – 복지(福地)를 찾아 옮기려고 애쓰는 것은 조선사람의 큰 병폐라는 것이며, 복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든 자기가 몸 붙여 사는 곳에 마음 잡아 부지런히 일하고 옳고 바른 마음씨로 살아나가면 그곳이 곧 복지가 된다는 것이며, 참서(讖書)라든가 비기(祕記)라든가 하는 것은 절대로 믿을 것이 못 되며 정감록이 또 한 번 조선사람을 망치지 않을까 저어한다는 것이며, 유학자로 보더라도 오늘날 부유배(腐儒輩)가 그런 것에 혹하지 정말 문장과 도학이 높은 분들은 조금도 그러한 일이 없었고 서사가(徐四佳) 선생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사주를 논박한 것이며 박연암(朴燕巖) 선생의 〈열하일기〉에 조선사람이 걸핏하면 산중으로 피란하는 것이 잘못임을 순순히 타이른 것이며, 사불범정(邪不犯正)이란 말이 있는데 어디서든지 평심서기(平心舒氣)로 살면 그만이지 하필 잡술의 하나인 풍수설을 믿어서 처신할 것이 무에냐, 란 것이며, 또 앞으로 설사 어떠런 환란이 닥친다더라도 동포와 조국과 더불어 사생을 같이할 일이지 내 혼자 구명도생하고저 하는 심지(心志)가 대의에 어긋난단 것이며, 또 공리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언제 일어날지말지 하는 환란을 미리 겁내서 지레 산중으로 도망간다는 것은 우리가 언제든 한 번은 죽을 운명에 놓여 있다고 그걸 비관해서 지금부터 손 묶고 가만히 들어앉았는 거와 같이 어리석은 일이란 것이며, [낙뢰를 겁내서 여름 한 철 굴속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였다.] 거지(居地)를 복(卜)한다면 이중환(李重煥) 선생이 말씀하신 생리(生利)와 인심과 산수와 형승도 안 볼 수 없지만 그보다도 지금은 교통의 편부와 교육기관의 유무를 보지 않을 수 없는 바인데 학령에 달할 아동이 연이어 있는 사람이 그 교통도 불편하고 학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면 앞으로 생활은 어떻게 영위해 나가며 아이들은 어찌 교육할 작정이냐 하는 것이며, 도대체 조선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도 미신과 잡술에 빠져서 정상적인 생업에 힘쓰지 않고 둔세피난(遁世避難)의 뜻을 품는다든지 터무니없는 요행과 맹랑한 소위 “발복”을 희구한다면 그만큼 조국의 새 건설에 지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분자의 존재가 곧 문화수준이 낮음을 표상함이어서 심히 유감스런 일이란 것이며, 음양오행에서 발원한 여러 가지 잡설이 과거와 현재에 있어서 얼마나 우리들의 생활을 구속하고 그 적극적인 발전을 제약해 왔나 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기막힌 일이다.
점하고 뭇구리하고 군신달리고 하는 일 등은 아녀자의 무지하기 때문의 소행이라 치더라도 또 풍수설에 혹해서 가산을 탕진하고 소위 “산송(山訟)”이라 하여 수많은 넌센스한 비극을 자아냈음은 모두 국부적인 폐해였다고 하더라도 우리 조상들의 일상생활이 전면적으로 지관(地官)과 일관(日官)의 근거 없는 조언에 제약되어 적극과감한 생활을 전개하지 못하고 따라서 위축적이고 고식적이고 퇴영적이어서 민족 전체의 생존에 지대한 해독을 끼친 일이며 이러한 해독은 모든 일에 구현되어 있지만 특히 통풍과 채광을 위주하여야 할 가옥 건축에 있어서도 그 소위 “명당”과 방위에만 구속되어서 위생상 또 미관상의 모든 고려가 무시된 결과 오늘날처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어수선한 부락이 구성되고 따라서 우리들의 심신에 가실 수 없는 영향을 끼치었음을 생각하면 우리들을 멸망에로 이끈 한 쪽의 큰 적이 곧 음양오행설에서 발원한 풍수설 기타의 모든 미신과 속설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뜻으로 보더라도 오늘날 오히려 일부의 식자 간에 참서비기류(讖書祕記類)가 신봉되어 심지어는 조선(祖先) 전래 세업지지(世業之地)를 버리고 소위 십승십길지지를 찾아서 떠돌아다니고 정감록(鄭鑑錄)을 억측곡해하고 견강부회해서 정상한 생업을 돌보지 않고 산간협지(山間陜地)에 숨어 살려는 무리들이 많음은 통탄할 일이다. 더욱이 이러한 경향이 한학(漢學)의 소양 있는 사람들 층에 침윤해 있음을 생각하면 나는 한학에 대한 무한한 증오를 느낀다. 한문은 이러한 의미에서도 철저히 배격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러한 말은 전에도 서인식(徐寅植) 씨 권태원(權泰元) 씨 같은 친근한 한학도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했으나 그들에겐 음양오행의 사상이 이미 고질이 되어서 다른 모든 점으로는 청종해도 이것만은 절대 고집해 오는 터이지만 오늘의 김기영 씨 또한 그러하다.
徐萬選 山林經濟 曰 惑地師之言 妄信其先葬之墓 犯忌風水 故 必爲絶嗣 東西遷葬 使其父祖之體魄 不得安隱乎地下 其非寒心之至哉.
(서만선의 〈산림경제〉에 이르기를 “더러 지관의 말해 혹해 이미 모셔놓은 묘가 풍수에 어긋나 필히 자손이 끊길 것이라 함부로 믿고 이리저리 이장함으로써 조상의 혼령이 지하에 편안히 계실 수 없게 하는 일이 있으니 지극히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徐居正 筆苑雜記 曰 牽合傅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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