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90년 전 풍경을 거닌다…신세계 속 ‘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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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관한 서울 명동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더 헤리티지’는 1935년 건립된 옛 조선저축은행 건물의 원형을 보존하면서 현대적으로 개·보수했다. [사진 신세계백화점·샤넬]

트위드 카펫이 깔린 샤넬 매장에 들어서자 천장의 꽃 모양 석고 부조가 진열장 속 제품보다 먼저 눈에 띈다. 격자무늬 칸칸이 화려하게 채워 흡사 유럽 궁전 연회장에라도 온 기분이다. 1935년 서울 명동에 세워진 이 건물이 ‘조선저축은행’이라는 간판을 달았을 당시부터 이어져 온 꽃 부조 장식물이다. 건물은 SC제일은행을 거쳐 지난 9일 전면 재개관하면서 신세계백화점 본점 ‘더 헤리티지’(서울 중구)라는 새 이름을 달았다. 바로 옆 본관(‘더 리저브’)에 이어 제2 명품관 역할을 한다.

“천장이나 기둥에 관심을 보이는 고객분들께 ‘90년 된 건물을 그대로 보존·복원한 곳’이라고 설명드리면 다들 감탄합니다”(샤넬 매장 직원 서영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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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늬 석고부조 천장이 돋보이는 1층의 1930년대 모습. [사진 신세계백화점·샤넬]

2015년 착수한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통해 5층 건물 전체가 1930년대 원형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오늘날 재료와 기술력을 통해 최신시설로 탈바꿈했다. 예컨대 5층까지 이어지는 중앙 에스컬레이터는 첨단으로 교체했지만, 건물 동남쪽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는 건립 초기 규모와 디자인을 유지했다. 1~5층 운행 상황을 알려주는 반원형 동판도 고풍스러운 디자인 그대로 재현했다. “건물 전체를 1935년 준공 당시와 90%가량 동일한 수준까지 복원했다”는 게 신세계 측 설명이다.

그리스 도릭 양식(Doric Order) 기둥이 두드러지는 이 고전적 건물은 한국전쟁 때도 참화를 피해 1985년 서울시 유형문화유산에 지정됐다. 바로 옆 신세계백화점 본점 본관(1930년 건축)과 함께 근대 건축 양식을 간직한 건물로 꼽힌다. 신세계는 2015년 SC제일은행 측으로부터 건물을 850억원에 인수하고 2005년 준공한 신관과 함께 3개 관을 연결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이를 위해 여러 차례 서울시 국가유산위원회 심의를 거쳤다. 리모델링에 착수한 이후에도 근대건축유산 전문가 등이 포함된 자문회의를 30여 차례 열었다. 자문에 참여한 김정신 단국대 명예교수(건축학)는 “웬만한 국보보다 철저하게 검토했고, 상업시설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원형 복원을 최대한 이뤄냈다”고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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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모습과 현재 샤넬 매장. [사진 신세계백화점·샤넬]

건물은 SC제일은행이 사용하던 중인 1995년 한차례 대수선을 거치면서 일부 원형이 훼손돼 이번 리모델링 땐 이를 걷어내고 90년전 양식으로 회귀했다. 이 과정에서 요즘은 사용하지 않는 재료나 조각 기법을 되살리는 게 난제였다고 한다. 자문단과 신세계 관계자들은 프랑스·일본 등의 1930년대 건물, 예컨대 도쿄 마루노우치의 메이지 생명관(明治生命館) 등을 답사하며 힌트를 얻었다. SC제일은행 시절 흔적도 일부 남겼다. 샤넬 매장 2층의 한쪽 구석에는 상평통보 주화 문양의 옛 벽지가 보존돼 유리벽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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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층 기획전시 공간. [사진 신세계백화점·샤넬]

해체한 부재(건물의 뼈대를 이루는 재료) 일부는 건물 4층 복도 진열장에 전시 중이다. 샤넬 부티크로 쓰이는 1·2층은 입장이 제한되지만 4층은 누구나 드나들 수 있고, 과거 연회장으로 쓰인 공간답게 화려한 샹들리에와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 두드러진다. 4층 한쪽엔 신세계 ‘상업사 박물관’의 소장품 일부를 가져와 추억의 ‘신세계 저금통’ 등 근대유물을 전시했다. 높이 3m에 이르는 화폐보관용 금고의 철제 문짝도 1층에서 떼와 이곳에 설치했다. 이밖에도 5층엔 전통 보자기 등 공예품을 전시하는 ‘하우스오브신세계 헤리티지’가 들어서는 등 건물 전체에 역사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건물에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약 700평, 2300㎡)로 매장을 연 샤넬 측도 “1935년 명동에 설립된 역사적 랜드마크” “샤넬이 오랫동안 유지해 온 헤리티지의 가치” 등을 강조했다.

근대건축유산 전문가인 김정동 목원대 명예교수는 “남대문·명동 일대가 일제강점기부터 상업 중심지이자 한국 근대문화가 꽃핀 곳인데, 옛 건물을 보존하면서 명품 마케팅과 수준 높게 어우러졌다”고 평했다. 김정신 교수는 “옛 서울역 건물(‘문화역 서울 284’), 옛 한국은행 본점(‘한국은행 화폐박물관’) 등 근대건축물 복원 노하우가 쌓인 결과”라면서 “앞으로 근대유산 보존·복원과 활용에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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