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의심마저 날려버린 바람, 이젠 샌프란시스코의 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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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후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온 ‘바람의 손자(Grandson of the Wind)’입니다.”

2023년 12월 16일(한국시간), 이정후(27)는 메이저리그(MLB)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입단 기자회견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샌프란시스코 구단과 역대 한국인 선수 최고액인 6년 총액 1억1300만 달러(약 1626억원)에 계약한 뒤다. 미국 일부 언론은 “아무래도 샌프란시스코가 과도하게 돈을 쓴 것 같다”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로부터 1년여 지난 현재, 그런 평가는 자취를 감췄다. 이정후는 지금 샌프란시스코에 진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28일까지 타율(0.324), 득점(22점), 장타율(0.546), OPS(출루율+장타율·0.929), 2루타(11개), 3루타(2개) 모두 팀 내 1위다. 타점(16점)과 출루율(0.383)도 2위다. 100타석 이상 타자 중 삼진(17개)도 가장 적다. 이날 텍사스 레인저스전에서 5경기 연속 안타를 때렸다. MLB닷컴은 “샌프란시스코가 그토록 기다리던 ‘수퍼스타’를 품에 안은 것 같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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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원 기자

·천재 타자=타자 이정후는 천재적이다. 여러 한국인 타자가 빅리그를 거쳤지만, 올해의 그처럼 빠르게 적응하고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선수는 없었다. 팻 버렐 샌프란시스코 타격코치는 한 인터뷰에서 “이정후는 공을 매우 잘 보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감각으로 스윙 여부를 결정한다”며 “서두르지 않고 자신을 믿으며 편안하게 스윙하는 게 최대 장점”이라고 감탄했다.

이정후는 왼손 타자인데도 올 시즌 왼손 투수 상대 타율(0.351)이 오른손 투수 상대 타율(0.310)보다 높다. 득점권 타율(0.343)도 시즌 타율을 웃돈다. 2루에 주자가 있을 때 타율은 0.444나 된다. 특히 경기 후반인 7회(0.500)와 8회(0.400)에 강하다. 올 시즌 3번 타자로 나오면서 장타력도 더 좋아졌다. 2루타는 벌써 11개로 내셔널리그(NL) 공동 1위다.

수비도 일품이다. 28일 텍사스전에서 조나 하임의 좌중간 안타 타구를 전력질주로 낚아챈 뒤 2루로 송구해 타자 주자를 잡아냈다. MLB 사무국이 소셜미디어(SNS)에 이 장면을 소개할 정도였다. 빅리그 데뷔 후 실책이 ‘0’이다.

·바람의 손자=이정후는 천재성을 아버지 이종범(55) KT 위즈 코치한테 물려받았다. 이 코치는 선수 시절 ‘바람의 아들’로 불린 원조 야구 천재다. 그런 이 코치도 자신의 별명이 훗날 MLB 무대로 뻗어 나갈 줄은 예상도 못 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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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원 기자

어린 시절부터 ‘바람의 손자’로 불린 이정후는 한때 이 별명을 쑥스러워했다. “나이 들어서도 ‘손자’로 불리면 좀 민망할 것 같다”고 했다. 이제는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별명이다. 샌프란시스코 구단은 이정후와 계약한 날, SNS에 “여기 ‘바람의 손자’를 만나보라”라고 썼다. MLB닷컴은 별명의 기원을 소개하며 “이정후는 한국 야구의 ‘왕족’ 출신이고, 그의 아버지는 한국의 전설적인 선수”라고 이 코치 활약상까지 전했다.

이정후를 아는 많은 이가 “그의 진짜 재능은 멘털”이라고 증언한다. 실제로 이정후가 “타석에서 한 번도 긴장해본 적이 없다”고 말해 화제가 됐다. 과거 한 팬이 SNS에 이종범-정후 부자를 비교하는 악성 댓글을 달자 이런 답변을 남겼다. “혹시 ‘이종범 아들’로 태어나 야구해본 경험이 있나. 난 그 부담감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올라왔다.” 이 코치는 나중에 그 얘기를 듣고는 “정후가 이제 진짜 어른이 됐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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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모양 가발을 쓰고 응원하는 ‘후리갠스’ 회원들. [사진 카일 스밀리 SNS]

·후리갠스=샌프란시스코 홈 경기 날이면, 경기장엔 ‘이정후 구호(정, 후, 리~)’가 울려 퍼진다. 구단이 직접 붙였다. 이름 끝 글자 ‘후(hoo)’ 덕분에 관중이 다 같이 연호하면 거대한 응원 구호처럼 들린다. 구단도 이정후 마케팅에 열을 올린다. 주말 홈 경기 외야 중견수 뒤편(142구역)을 이정후 응원 구역, 이른바 ‘정후 크루’로 운영한다. 이 구역 티켓을 사면 이정후 이름을 새긴 기념 티셔츠도 준다. 최근 지역지 샌프란시스코 스탠다드는 “올 시즌 팀에서 가장 많이 팔린 유니폼은 51번(이정후)이다. 주문이 밀려 제작 일정에 차질을 빚을 정도”라고 전했다.

현지 팬클럽까지 생겨났다. 이름이 ‘후리갠스(hoo Lee Gans)’로, 광적인 팬을 뜻하는 ‘훌리건(hooligan)’을 딴 작명이다. 미국인 팬(카일 스밀리)이 회장이다. 이정후는 “이런 관심에 부담을 느끼지는 않는다. 감사할 따름”이라며 “이런 대우에 걸맞은 결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긴다”고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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