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소년중앙] 판타지 속 판타지를 찾아서 90화. 옥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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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으로부터 탄생해 인간을 구한 생명의 곡물 

1493년 이탈리아의 항해자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영어로 콜럼버스라 불리게 될 항해자가 한 땅에 도착했습니다. 일찍이 유럽인들이 찾지 않았고 그리스도교 하나님의 은총도 닿지 않는 곳이라 여겼기에 ‘신대륙’이라 불린 땅. 아메리카라는 이름으로 알려질 그 땅에는 사실 본래부터 많은 이가 살고 있었죠. 그들은 기묘한 모습의 이방인을 환영하기 위해 많은 선물을 가져왔지만, 콜럼버스는 그들이 몸에 걸친 황금 장식에만 관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정을 마치고 콜럼버스가 수많은 선물과 함께 스페인 왕궁에 들어섰을 때, 귀족들은 그가 가져온 온갖 물건, 특히 반짝이는 황금에 환호했어요.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죠. 그 선물 속에 생명을 구할 가치 있는 보물이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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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에서 옥수수의 신 마아와 동일시되는 신, 훈 후나푸. 그의 이야기는 옥수수가 지닌 생명력을 상징한다.

빠르게 자라고 수확량도 많아 무수한 이들을 기근으로부터 구원한 작물, ‘가난한 이들의 곡물’이라 불리며 천시되기도 했지만, 수많은 이의 주식이자 동물의 사료로 수백 년에 걸쳐 사랑받고, 자동차 연료로까지 애용되는 생명의 열매. 주머니에 싸인 독특한 모습에 ‘터키의 곡물’이나 ‘동방의 밀’이라 알려진 황금의 곡물. 바로 아메리카에서 ‘신의 곡물’이라 칭송되는 작물, 옥수수입니다. 옥수수는 지금의 멕시코 남부 지역에서 탄생한 곡물인데요. 지금으로부터 약 9000년 전 재배가 시작돼 수천 년에 걸쳐 아메리카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콜럼버스를 통해 유럽에 전해졌습니다.

옥수수는 기존에 유럽에서 재배하던 밀이나 보리보다 척박한 땅에서 훨씬 잘 자라며, 수확량이 많은 데다, 무엇보다 밀과 달리 굽거나 찌기만 해도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배를 채우는 값싼 곡물’로 가난한 이들의 주식이 되었죠. 중앙·동부 유럽에선 “마지막 옥수수 이삭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며, 마지막 이삭으로 옥수수의 영혼을 담은 인형을 만들어 기리기도 했죠. 쌀이나 밀, 보리처럼 다른 곡물을 주로 먹던 곳에서도 이처럼 사랑받았으니, 처음 옥수수가 재배된 메소아메리카에서 중시하는 건 당연했습니다.

마야에서는 우리 인간이 옥수수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죠. 오랜 옛날, 신들은 진흙·나무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진흙으로 된 인간은 너무도 약해서 금방 부서지고 말도 제대로 못 했어요. 다음에 만든 나무 인간은 매우 튼튼하고 말도 했지만, 아무런 감정 없는 기계 같은 존재로 신만이 아니라 동물과 사물도 이들을 미워했기에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죠. 마지막으로 하늘과 땅이 협력하여 옥수수 반죽으로 인간을 만드니, 그들은 강할 뿐만 아니라 마음과 지혜를 갖고 신을 경배했습니다. 지혜로운 인간의 재료인 옥수수. 그만큼 놀라운 생명의 씨앗이라는 이야기죠.

아즈텍 신화에서 옥수수는 본래 땅속 깊은 곳에 숨겨진 신성한 곡물이었다고 합니다. 오직 신만이 접근할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신의 작물’이었죠. 하지만 인간들이 굶주리는 것을 본 지혜의 신 케찰코아틀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 옥수수를 전해주기로 합니다. 하지만, 옥수수를 가져오는 건 금지되어 있었기에 케찰코아틀은 개미로 변하여 지하 깊은 곳에서 옥수수 알갱이를 물고 인간에게 전해주었죠. 옥수수 자체를 신이라고 여기는 신화도 있어요. 오악사카 지방의 미스키틀렉(Mixtec) 족과 안데스의 케추아 족에서는 제각기 위대한 조상신이나 대지의 여신(파차마마)의 몸에서 온갖 식물이 자라났다고 하죠. 마야의 신화집, 포폴 부에는 ‘훈 후나푸’라는 신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와 형 부쿠프 후나푸는 지하 세계의 신들에게 납치되어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의 머리만은 호박나무에 걸려 열매로 변했죠. 지하에서 자라나 땅 위로 올라오는 생명의 존재, 그가 어떤 열매로 변했는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그 열매에 머리카락이 있다는 점에서 훈 후나푸는 옥수수의 신 마아와 동일시됩니다. 마야에서 마아, 또는 훈 후나푸는 옥수수의 신이자 풍요와 생명의 원천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죠. 옥수수를 신성한 존재로 여긴 마야의 귀족이나 왕족 중에는 신처럼 긴 머리를 중시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갓 태어난 아이들의 머리를 나무판으로 눌러 긴 머리 모양을 만들기도 했죠. 건강에 좋지는 않겠지만, 당시엔 이것이 이상적 미의 기준이자 교양과 신성한 계급을 상징했습니다. 지금도 칠레나 멕시코에서는 여전히 옥수수를 기리는 축제가 열려요.

신으로부터 탄생하여 우리 몸을 이룬 생명의 곡물, 옥수수. 세계로 퍼져나간 이 곡물은 지금도 수많은 이를 구원하고 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게 있습니다. 우리 몸의 원천이자, 우리를 구하는 옥수수 역시, 우리 인간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거죠. 옥수수는 본래 테오신테라는 식물을 개량한 것으로, 수천 년에 걸쳐 사람들이 노력해서 만든 결과물이죠. 테오신테 한 송이엔 보통 5~10개의 열매가 달려 있는데, 제각기 작고 단단한 껍질에 싸인 열매는 시기가 되면 일제히 흩어져 떨어집니다. 하지만, 옥수수는 다릅니다. 한 송이에 수백 개의 큰 열매가 달린 옥수수는 전체가 단단한 껍질에 싸여서 흩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직접 열매를 따서 한 알씩 심지 않으면 번식할 수 없죠. 신의 곡물로 태어나 많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지만, 인간의 손길을 통해서만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작물. 옥수수가 인간과 가장 가까운 존재라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인간의 손에 태어나 인간을 살려 나간 옥수수. 팝콘과 시리얼, 전분과 시럽, 그리고 기름을 통해 하루를 함께하는 이 곡물엔 오래된 신화와 생명의 숨결이 조용히 깃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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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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