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합의문 없는 정상회담, 원인은 3500억달러…차∙반도체 볼모로 잡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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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공동합의문이 나오지 않은 이유는 자동차·반도체 등 한국의 주력 수출품에 대한 15% 관세율을 명시하자는 한국의 요구를 미국이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백악관 내각 회의실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한국을 포함한 주요국가와의 무역협상을 자신의 주요 성과로 제시했다. 이재명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다음날 열린 이날 국무회의는 3시간 넘게 진행됐고, 회의 전 과정이 생중계됐다. EPA=연합뉴스
특히 미국 측은 해당 관세의 문서화 조건으로 한국이 투자하기로 약속한 3500억 달러(약 486조원)의 구체적 조달 시기와 방식을 명문화할 것을 역으로 요구하면서 양측의 이견 조율이 쉽지 않을 거란 관측이 나온다.
“합의 종료가 아니라 시점 미뤄놓은 것”
정부 관계자는 27일(현지시간)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양측이 공동합의문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동차 관세와 대미 투자금에 대한 구체안을 놓고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며 “오히려 미국이 정상회담을 계기로 합의문 작성을 압박했지만 한국 측이 시점을 연기했다”고 전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관계자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이 민감하게 여겼던 쌀과 쇠고기 추가 개방과 관련한 한국 측의 ‘불가’ 입장을 수용하는 대신 투자금 3500억 달러 가운데 직접 투자 비중을 대폭 늘리고 이를 명문화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미국의 요구는 “투자금 대부분 떼일 가능성이 적은 대출과 보증”이라던 한국측의 입장과 다르다. 사실상 미국 마음대로 쓸 ‘백지수표’를 입금하라는 의미에 가깝다. 미국은 이 조건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 자동차 관세 등을 문서화하지 않겠다고 했고, 결국 합의문은 나오지 않았다.
현지 소식통은 “정상회담 직전까지 논의가 이어지다가 한국 측에서 ‘성급한 결과를 위해 나쁜 합의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이 나오며 논의가 중단됐다”며 “엄밀히 말하면 정상회담은 무역합의 종료가 아니라 합의의 시점을 미뤄놓은 모양새”라고 말했다.
9000억 달러 판돈 ‘치킨게임’…韓日은 ‘눈치게임’
미국은 정상회담을 마치자마자 한국과 ‘치킨게임’을 벌이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이날 CNBC 인터뷰에서 “한국과 일본의 투자자금 그리고 다른 나라의 자금으로 국가 및 경제 안보 기금이 조성되는 것을 보게될 것”이라며 “그들이 미국 사회기반시설 건설을 위해 우리에게 자금을 댈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23일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열린 한일 정상 공동 언론 발표를 마친 뒤 마주보며 미소짓고 있다. 연합뉴스
러트닉 장관은 이어 “이는 국부펀드가 아니라, 한국·일본 등의 자금으로 조성된 국가경제안보기금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의 인프라 건설에 투입될 기금이 세금이 아닌 한국(3500억 달러)과 일본(5500억 달러)의 투자금 9000억 달러로 마련될 거란 주장이다.
이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국가경제안보기금이란 개념은 협상 과정에서도 나온 적이 없던 개념”이라며 “정상회담 직후 한·일의 투자금의 운용 방안을 일방적으로 공개한 것은 압박의 의미로 이해된다”고 전했다.
그는 “3500억 달러 투자는 먼저 5500억 달러 투자를 결정을 일본을 벤치마킹한 측면이 있다”며 “미국과의 최종 합의 역시 조만간 방미할 일본 협상단의 결과를 지켜본 뒤 해도 늦지 않다는 내부적 판단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이 지난 26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바라보며 발언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미국과의 최종 담판이 한·일의 ‘눈치게임’ 양상으로 전개되자 이날 미국을 방문하려던 아카자와 료세이(赤澤亮正) 일본 경제재생상은 돌연 방미 일정을 취소했다. 당초 아카자와 경제재생상은 방미 계획을 발표하면서 자동차 관세와 대미 투자에 대한 견해차를 좁혀 합의문을 논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일본 역시 한국과 동일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자동차 관세 당분간 25%…“팔수록 손해 누적”
문제는 최종 합의가 늦어질수록 한국과 일본 모두의 핵심 수출품인 자동차에 대한 관세 부담이 누적된다는 점이다. 현재 미국은 한국 자동차에 대해 25%의 관세를 부과하고 일본과 유럽연합(EU)엔 27.5%를 부과하고 있다.

박경민 기자
이중 EU는 자동차 관세를 15%로 낮추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발효 시점은 미국산 농산물 수입 확대 등을 포함한 관련 법안의 발의 이후다. EU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자동차 관세를 낮출 수 있지만, 주력 수출품인 농산물 시장 개방 문제와 맞물려 입법을 늦추고 있다.
결국 한국과 일본은 대규모 대미 투자가, EU는 농산물 시장이 자동차를 지키기 위한 일종의 ‘볼모’가 되면서 고율의 자동차 관세를 당분간 부담하게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자동차는 수많은 협력업체와 맞물려 돌아가는 특성 때문에 당장 손해가 나더라도 생산과 수출을 멈출 수 없는 구조”라며 “당장 가격을 올릴 수 없는 상황에서 15% 관세를 물고 수익을 낼지 장담하기 어려운데 현재 적용되는 25% 관세 상황은 차를 팔수록 손해가 나는 구조”라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6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동맹국에 대한 관세 정책과 자신의 안보 정책을 성과로 제시했다. 해당 발언이 이어지는 가운데 미국의 외교와 안보를 주도하는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외교 소식통은 “미국이 자동차 관세만으로도 강한 압박을 가하고 있지만, 향후 반도체·의약품에 대한 품목관세가 부과되면 압박 강도는 3배로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특히 반도체와 의약품은 EU에만 15% 관세를 명시하고 한·일엔 ‘최혜국 대우’라는 조항만 있다”며 “한·일은 EU가 먼저 결론을 내야 최저관세가 적용되는 구조란 점도 변수”라고 덧붙였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 역시 자동차에 대한 고관세 상황을 오래 끌고갈 경우 미국인의 필수품인 자동차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치킨게임을 장기간 이끌기에는 부담이 될 수 있을 거란 관측이 함께 제기된다.

이재명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방명록 작성 때 쓴 만년필을 선물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유명희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이날 워싱턴 한미경제연구소(KEI)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협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새로운 시대에는 끝없는 협상이 이어질 수 있다”며 “구체적인 결과와 세부 사항을 만들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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