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세 발짝 반 나가, 시선 45도”…연출가는 떠났지만 연출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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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서울 마포구 산울림 소극장에서 열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기자간담회에서 배우 이호성(오른쪽)이 블라디미르를 연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임영웅 선생님이 하늘에서 이 작품을 보고 계신다면 어떤 느낌일까. 호랑이처럼 혼을 내셨을까, 아니면 흐뭇하게 보실까’ 하게 됩니다.”

2005년부터 에스트라공을 맡은 배우 박상종이 말했다. 8일 서울 마포구 산울림 소극장 개관 40주년 기념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이하 ‘고도’) 기자간담회에서다. 1994년부터 블라디미르를 맡은 이호성은 “(임 연출의 노트엔) ‘세 발짝 반 나가서 시선을 45도 튼다’라고 돼 있다. 너무 명료하게 시선·동선이 규정돼 있다 보니 뭐 하나는 삐끗하는데, 임 선생님은 술 사주시고…”라고 돌아봤다.

임영웅 연출이 고도였고, 고도가 임 연출이었다. 임 연출의 1주기를 맞아 그의 ‘고도’가 10일부터 다음 달 4일까지 무대에 오른다. 극단 산울림을 창단한 임 연출은 첫 공연으로 1969년 아일랜드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올렸고, 건강이 악화한 2019년까지 50년 동안 약 1500회 공연에서 22만 관객을 불러모으며 사랑받았다.

이번 공연은 출연 배우들도 ‘임영웅 고도’의 역사를 함께 했던 이들로 채워졌다. 주연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역의 이호성·박상종 외에도 포조 역으로는 정나진이 캐스팅됐다. 럭키에는 새로 문성복이, 소년 역에는 그의 아들 문다원이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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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공연은 고 임영웅 연출의 노트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최민지 기자

고인의 해석을 되살릴 수 있었던 건 꼼꼼한 연출 노트 덕분이다. 이날 산울림이 공개한 임 연출의 노트에는 대사 한 줄 한 줄마다 여러 방향으로 누운 쐐기가 그려져 있었다. 임 연출의 아들인 산울림 임수현 예술감독은 “쐐기가 가리키는 방향이 배우의 시선 각도”라고 설명했다. 이 노트를 제작진과 출연 배우들이 모두 복사해 돌려봤다.

시대 변화에 맞춰 조금씩 바꾼 연출과 애드리브는 또 다른 감상 포인트다. 포조는 임영웅 버전보다 좀 더 과장된 몸짓과 톤으로 대사를 읊고,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논점 없이 주고받는 대사는 보다 빠르고 리드미컬해졌다. 럭키의 느릿한 춤을 보며 못마땅해하던 에스트라공이 양손을 위아래로 교차하며 로제의 ‘아파트’ 춤을 추기도 한다.

1953년 파리에서 초연한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조리극의 대명사다. 나무 한 그루 달랑 있는 길 위에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아무리 기다려도 끝내 오지 않는 고도, 대체 누구일까. 이호성은 “한 번은 교도소 공연에서 수감자들에게 고도가 누구냐고 물으니 술, 와인, 빵, 여자, 고기, 멋진 여행이라는 다양한 답변이 나왔다”고 말했다. 박상종의 답은 이랬다. “베케트는 신이 아니라고 했지만, 제가 생각하는 고도는 우리가 의지하고 위탁할 수 있는 절대자, 저희가 무대에 오르기 전에 기원하는 바로 그 존재 아닐까요.”

기승전결이나 논리적 타당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함으로써 현대 연극의 새 시대를 연 ‘고도’. 국내에선 임 연출의 작품이 가장 유명하지만 2022년 극단 산울림이 갖고 있던 공연 라이선스가 풀리며 다양한 버전으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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