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필리버스터 한물 간 카드?...범여 180명 매일 밤샘할 판,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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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29회 국회(정기회) 제9차 본회의와 필리버스터가 끝난 후 의원들이 본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뉴스1

긴 연휴 뒤 여야가 앞다퉈 선전포고에 나서면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가 정기국회의 핵심 변수로 부상했다. 법안 저지를 위한 야당의 최후의 수단이지만 자칫 중도층에 발목잡기로 보이기 쉽고, 여당 입장에선 야당에 필리버스터 명분을 주면 진영 입법이 지연돼 지지층에 무능력하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9일 기자간담회에서 필리버스터 재개 가능성에 대해 “지도부에서 논의해야 할 사안”이라면서도 “찬성하면 찬성하는 대로, 반대하면 반대하는 대로 국민에게 이유를 밝히고 치열하게 토론하는 과정을 거치면 된다”고 말했다. 추석 연휴 전 만지작거리던 전 법안 필리버스터 카드를 언제든 꺼내들 수 있다는 의미다.

추석 연휴 전 동대구역 집회(9월 21일), 서울 시청역 집회(9월 28일)를 등 장외투쟁에 몰두했던 국민의힘은 이제 원내투쟁으로 선회하는 모양새다. 당내에서는 “필리버스터가 여권의 입법 독주를 제어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평가도 선회 배경 중 하나”(국민의힘 중진의원)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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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식 국회의장이 9월 29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서 방송문화진흥회법(방문진법) 필리버스터 진행 중 피곤한 듯 눈가를 만지고 있다. 연합뉴스

범여권이 180석을 차지한 의석 구도에서 필리버스터는 소수 야당의 ‘울며 겨자 먹기’ 정도로 여겨졌다. 국회법상 개시 24시간이 지나면 재적의원(298명) 5분의 3인 179명 이상의 동의로 강제 종결이 가능해 ‘무제한’이란 의미가 무색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달라졌다. 개별 법안 통과를 막진 못하더라도 모든 법안에 필리버스터를 신청하면 여당이 처리를 원하는 법안 상당수의 처리를 장기간 지연시킬 수 있다는 인식이 국민의힘 의원들 사이에 확산됐기 때문이다. 추석 연휴 이후 민주당이 상정을 예고한 70개 비쟁점 법안 전부에 필리버스터를 신청하면 평상시 하루면 끝나는 비쟁점 법안 처리 시간을 71일까지 늘일 수 있다.

국민의힘 재선 의원은 “체력전에서도 우리가 유리하다”고 말했다. 야당은 필리버스터 시 발언 의원 등 최소 인원만 본회의장을 지키면 되지만, 민주당 등 범여권에서는 필리버스터 종결을 위해 사실상 전원 본회의장에 대기해야 한다. 우원식 국회의장, 이학영 부의장도 밤새 맞교대로 의장석을 지켜야 한다. 여권 관계자는 “지금 국회의장실에선 힘들다는 곡소리가 터져 나온다”고 말했다.

다만 국민의힘도 비쟁점 법안 필리버스터에는 부담을 느끼는 기류다. 장기 필리버스터가 쟁점 법안 저지를 위해서라지만 유권자들에게 민생 정치의 발목을 잡는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지난 8일 “필리버스터 여부는 원내 협상 전략과 직결되기 때문에 당장 답변하긴 어렵다”고 신중론을 편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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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가 9월 28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전날 본회의에 상정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종료를 기다리며 문진석 원내운영수석을 비롯한 의원들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당은 이미 필리버스터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국민의힘에 “민생 발목 잡기”라는 프레임을 씌우기 위한 공세를 펴고 있다. 하지만 속앓이가 상당하다. 일단 체력이 문제다. 전북 지역 의원은 “연말까지 지역구 관리도 틈틈이 해야 하는데 필리버스터에 발목 잡히면 차질을 각오해야 한다”고 했다. 충청 지역 의원은 “지역에서 KTX를 타고 국회로 출·퇴근하는데, 필리버스터 대응 때문에 매일 국회에 대기하면 의정 활동 자체도 힘이 부친다”고 말했다.

166석인 민주당은 필리버스터 종결마다 조국혁신당 등 최소 13명의 범야권 의원을 개별적으로 설득·독려해야 하는 것도 부담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하루 이틀이면 몰라도 필리버스터가 장기화하면 우리 입장에서는 (조국혁신당, 진보당 등에) 종결 표결 참석을 부탁하는 을의 입장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민주당이 꺼내든 극약 처방이 국회법 개정이다. 민주당은 필리버스터 종결 시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국회법 조항을 과반으로 완화하는 방안과 필리버스터를 신청하는 교섭단체 소속 의원이 일정 수 이상 국회 본회의장을 지키지 않으면 필리버스터를 강제 종결할 수 있게 하는 방안 등을 검토 중이다. 여권 관계자는 “막무가내식 발목잡기를 방어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이현우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국민의힘은 필리버스터를 일상적 정쟁 수단으로 남용하려 하고, 민주당은 거여의 편의를 위해 국회법을 뜯어고치려는 모양새”라며 “양극화된 정치가 소수 정당의 발언권을 보장해 다수당의 독주를 막고 결과적으로 정치적 합의를 이끄는 수단으로 고안된 필리버스터 마저 희화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선우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민생 법안을 볼모 삼은 장기 필리버스터는 소수 정당의 합리적 저항권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며 “그렇다고 필리버스터라는 제도 자체를 무력화려는 시도는 모든 걸 힘으로 해결하려는 거대 여당의 폭력으로 평가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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