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경력직 피아니스트 에릭 루의 쇼팽 제패...'중국 바람' 거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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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회 쇼팽 국제 콩쿠르 우승자인 에릭 루(오른쪽에서 두번째)가 18일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결선 연주를 마친 모습. 사진 쇼팽 인스티튜트

“1등상과 금메달의 주인공은 에릭 루!”
21일 오전 2시 30분(현지시간) 폴란드 바르샤바의 국립필하모닉홀에서 청중의 환호 속에 피아니스트의 이름이 불렸다. 20일 밤 최종 결선이 끝난 제19회 쇼팽 국제 콩쿠르가 막 결정한 우승자였다. 미국 피아니스트 에릭 루(27)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한동안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앞머리를 연신 쓸어내렸다. 북받치는 눈물을 참는 표정이었다. 무대 중앙으로 나오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짧은 수상 소감에서 “꿈이 이뤄졌다”고 했다.

대만인 아버지와 중국인 어머니를 두고 미국에서 태어난 루는 이번 콩쿠르에서 화제의 참가자였다. 그는 10년 전 최연소인 17세로 참가해 4위에 올랐다. 조성진이 한국인 최초로 우승했던 때다. 이후 루의 경력은 탄탄했다. 20세에 영국의 리즈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화제를 모았고, 워너 클래식스와 계약해 음반을 여러 장 냈다. 시카고 심포니, 런던 심포니, 리카르도 무티, 마린 알솝 등 무대에서 함께 한 오케스트라와 지휘자의 이름도 화려하다. 이미 암스테르담ㆍ런던ㆍ함부르크와 서울 등에서 여러 번 공연한 프로 연주자이며 앞으로의 연주 일정도 빼곡하다. 신인의 등용문으로 인식되는 국제 콩쿠르에서 이례적인 ‘경력직’ 우승자다.

쇼팽 콩쿠르는 루에게 재도전할만한 기회였다. 타 명문 대회에서 우승 또는 입상한 피아니스트들이 예선을 면제받을 수 있는 규정 덕분이다. 루는 리즈 콩쿠르 우승 경력을 바탕으로 본선에서 경연을 시작했다.

올해 새로 추가된 규정도 루의 우승을 도왔다. 쇼팽 콩쿠르는 이번 회부터 결선 무대에서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협주곡뿐 아니라 독주곡을 지정해 연주하도록 했다. 쇼팽의 후기 작품인 ‘환상 폴로네이즈’였다. 그동안 쇼팽 콩쿠르는 두 개의 협주곡 중 한 곡만으로 마지막 경연을 펼쳤다. 올해의 심사위원장인 게릭 올슨은 쇼팽 인스티튜트와의 사전 인터뷰에서 “작곡가의 젊은 시절 작품인 협주곡들만 보고는 피아니스트를 판단하기 힘들다”며 작곡가 말년의 작품을 지정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10년 전 이 대회의 최연소 참가자였지만 이제 연장자에 속하는 루에게 말년의 무게를 표현해야 하는 ‘환상 폴로네이즈’는 유리한 작품이었다. 18일 열린 결선 무대에서 루는 이 작품이 가진 상상력을 능숙하게 그려냈다.

또한 쇼팽의 협주곡 2번을 골라 깊은 음악성을 선보였다. 무엇보다 숱한 무대 경험을 바탕으로 오케스트라와 절묘한 호흡을 이끌고 나갔다. 스페인의 음악 평론가인 파블로 로드리게즈는 “이미 프로 연주자인 만큼 그의 연주는 다른 경연자와 차원이 달랐다. 경연이 아닌 공연이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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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회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에릭 루. 사진 쇼팽 인스티튜트

정작 본인은 힘들게 경연을 이어갔다. 본선 3차 무대에서는 건강 이상을 이유로 순서를 연기했다. 마지막 무대에서는 전반부에 피아노 의자 대신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앉아 연주했다. 이런 어려움 끝에 그는 ‘재수 우승’을 이뤄냈다. 또 1번에 비해 비교적 적게 선택되는 2번 협주곡으로 우승하고, 전통적 명기인 스타인웨이 대신 파지올리로 1위에 오른 기록을 추가하게 됐다.

1927년 시작해 곧 100주년을 앞둔 쇼팽 국제 콩쿠르는 클래식 음악의 경연대회 중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 마우리치오 폴리니, 마르타 아르헤리치,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등 역대 우승자 명단이 막강하다. 여기에 라파우 블레하츠(2005년), 조성진, 브루스 리우(2021년) 등 떠오르는 피아니스트들도 쇼팽 콩쿠르에서 배출됐다. 올해의 우승 상금은 6만 유로(약 9900만원)다.

이번 대회의 가장 큰 특징은 중국 바람이었다. 본선 84명 중 28명이 중국인이었고, 최종 11인 중에는 3명이 중국 국적이었다. 여기에 에릭 루를 포함해 미국ㆍ캐나다 국적인 중국계 피아니스트가 3명 더 있었다. 이 중 중국계 캐나다인 케빈 첸이 2위를 차지했고, 3위에는 중국 국적의 지통 왕이 올랐다. 또한 중국 국적의 17세 연주자 티안여 류는 일본 구와라하 시오리와 4위 공동 수상과 함께 최우수 협주곡 연주상을 받으며 새로운 스타 탄생을 알렸다. 대회 1~4위를 중국계 연주자들이 휩쓴 것이다. 한국의 형제 피아니스트인 이혁과 이효는 3차 본선까지 진출했지만 최종 11명에는 들지 못했다.

대회를 주최하는 쇼팽 인스티튜트는 역대 최다인 640명이 참가했다고 밝혔다. 영상 심사 후 162명이 예선에서 연주했고 이는 다시 본선 84명으로 추려졌다. 쇼팽 콩쿠르는 모든 과정을 생중계했고 다시 볼 수 있는 버전으로도 유튜브에서 제공하고 있다. 쇼팽 인스티튜트는 “특히 일본 참가자인 구와하라 시오리의 마지막 경연 생중계를 7만1000명이 시청하는 기록을 세웠다”고 밝혔다.

콩쿠르는 자체 웹페이지와 유튜브뿐 아니라 틱톡에서도 생중계를 제공하며 전 세계 청중을 끌어들였다. 콩쿠르 측은 또 “5개 국어로 페이스북을 운영했으며 중국 웨이보, 인스타그램, 틱톡, 트위터 등에서도 활발히 소통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일본ㆍ폴란드ㆍ인도에 이어 네 번째로 생중계를 많이 시청한 나라로 기록됐다. 이번 대회의 우승자인 에릭 루는 유럽에서 우승자 공연 투어를 시작하고, 한국에서는 다음 달 21일 KBS교향악단과 협연, 23일 통영국제음악당과 26일 서울 예술의전당 독주회 무대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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