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89세 '최고령 리어왕', 90세 연기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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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하게 연기했다. 끝의 끝까지도. 한국전쟁 상흔이 남은 땅에 배우란 직업을 알렸고, 무심히 쇼츠를 넘기는 시대에 ‘예술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무대 위로 꺼냈다.
연극, 드라마, 영화. 매체도 가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종횡무진(縱橫無盡). 지난해 열린 제60회 백상예술대상에서 ‘대중문화예술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특별 연극을 선보인 그는 “예술이란 영원히 미완성”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완성을 향해 고민하고, 노력하고, 도전하는 게 배우의 역할”이라고 정의하던 ‘최고령 현역 배우’ 이순재가 25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91세. 데뷔 69년만이다.

배우 이순재는 2022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를 보고 일명 굿쟁이라고도 하잖아요. 무대만 깔아놓으면 새로운 힘이 나죠. 그게 배우들의 생명력이요."라고 말했다. 사진은 올해 1월 촬영된 고인의 모습. 권혁재 기자
25일 소속사 에스지웨이엔터테인먼트는 이순재가 이날 새벽 별세했다고 밝혔다.
90세 받은 상에도 눈물 흘렸다

이순재 배우는 지난 1월 2024 KBS 연기대상 수상 무대에 오르며 후배들의 부축을 받기도 했다. 연합뉴스
고인은 지난 1월 드라마 ‘개소리’(2024)로 KBS 연기대상을 받으며 현역 배우의 면모를 자랑했다. 2007년 MBC 연예대상 이후 받는 첫 연기대상에, 그는 눈물을 흘렸다. 수상소감을 말하면서 그는 “60세가 되어도 잘하면 공로상이 아니라 상을 주는 것”이라며 “연기는 연기로 평가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작품을 위해 힘써준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공을 돌리기도 했다.

배우 남정임(왼쪽)과 이순재. 1966년 12월 8일 개봉한 정진우 감독의 영화 '초연' 속 주인공들이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이순재가 연기를 시작한 1956년은 배우라는 직업이 막 알려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는 서울대 철학과 3학년이던 시절 올린 유진 오닐의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했다. 1961년 KBS 개국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다’를 통해 본격적으로 방송계에 진입한 그는 TBC 공채 1기로 발탁되며 TBC 전속 연기자 활동을 시작했고, 1966년 영화 ‘초연’으로 스크린에 나선다. 69년에 걸친 그의 활동기록은 곧 한국 대중문화예술사가 됐다.
꿈 많은 고등학생에서 ‘종횡무진’ 배우까지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에서 지내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가족과 함께 피란길에 올라 대전에 정착했다. 호적상으로는 1935년생이다. 대전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연극 ‘햄릿’ 무대에 오르며 연기에 대한 애정을 키웠고, 대학 재학 중엔 연극반을 재건해 전국대학연극경연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동인제 극단 ‘실험극장’을 창단하며 연기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1977년 TBC(동양방송)에서 방영됐던 드라마 '딸'. 맨 아랫줄에서 오른쪽이 배우 이순재다.
무대를 기반으로 활동해오던 이순재는 1964년 TBC 창립 멤버로 합류하면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기 시작했다. 국내 최초 일일연속극 ‘눈이 나리는데’(1964)를 시작으로, 최초의 TV 수사극 ‘형사수첩’ 등에 출연하며 대중적 입지를 다졌다. 고대하던 영화 출연의 기회도 생겼다. 1966년 정진우 감독의 ‘초연’을 통해 스크린에 데뷔했고, 1976년에는 허준의 일대기를 그린 최인현 감독의 영화 ‘집념’으로 제13회 백상예술대상 최우수 남자연기상을 받기도 했다.
그의 연기 역사는 한국 현대사와도 맥을 같이한다. 1980년 11월, 전두환 정부의 언론 통폐합 조치로 그가 몸담았던 TBC가 문을 닫았다. 이후 그는 다른 배우들과 함께 활동 무대를 KBS, MBC로 넓혀갔다.
대중 앞에 한 발 더

1992년 서울 면동초등학교에서 열린 민자당의 중랑 갑 정당연설회에 이순재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나온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출연진들. 아랫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이순재다. 당시엔 국회의원 신분으로 연기를 병행하는 데에 법적 제약이 없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이순재 의원’으로 대중 앞에 섰다. 문화계 인사들의 정계 진출이 이어지던 시기, 고인은 동료 배우 이낙훈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했다. 제13대 총선에서 낙선한 그는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서울 중랑구 갑에 출마해 당선됐다. 당시 방송국에 저작인접권이 일임되어 있던 저작권법을 수정, 실연자인 배우의 저작인접권을 제도화하는 등 문화정책의 필요성을 알렸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허당 할아버지 역할을 맡은 그는 몸을 사리지 않고 코믹한 연기를 펼쳤다. 사진 MBC 홈페이지
그는 임기를 마친 후 ‘의원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신 연기자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교장 선생님 박봉학 역을 맡은 MBC 일일연속극 ‘보고 또 보고’(1998~1999)와 허준의 스승 유의태 역을 연기한 MBC 사극 드라마 ‘허준’은 각각 일일연속극(57.3%)과 사극 드라마(64.8%)의 최고 시청률 기록을 세웠다.
그런 그에게 ‘야동순재’라는 격 없는 별명까지 붙은 건 일일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2006~2007) 때문이었다. 그는 가족에게 큰소리를 치지만 밖에선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허당 할아버지 이순재를 연기했다. 몸을 사리지 않은 그의 연기는 최근까지도 각종 플랫폼을 통해 회자되며 대중에게 웃음을 안겼다.
담당의 “휴식해야” 말할 때까지 무대에 섰다

2023년 오른 연극 '리어왕'에서 배우 이순재는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 두 딸의 아첨에 넘어가 모든 것을 잃게되는 과정을 연기했다. 사진 연우무대, 에이티알
방송에서의 왕성한 활동도, 고인이 연극에 품은 애정을 이기진 못했다. 그는 ‘세일즈맨의 죽음’(2000), ‘늙은 부부의 이야기’(2005), ‘사랑별곡’(2013), ‘황금연못’(2015), ‘앙리 할아버지와 나’(2017) 등 꾸준히 연극활동을 이어갔다.
2022년엔 동시에 네 편의 연극을 소화했고, 그해 12월부턴 러시아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를 통해 조연(쏘린) 출연과 첫 상업 연극 연출을 병행했다. 2023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수작인 ‘리어왕’을 원작으로 하는 동명 연극의 주연을 맡은 그는 ‘최고령 리어왕’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지난해엔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의 에스터를 1달 정도 연기하다 담당의로부터 휴식을 권고받고 하차했다. 여력이 닿는 데까지 무대에 오른 것이다.
“열심히 한 배우로 기억해달라”

지난 2020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배우 이순재는 인생의 명대사 중 하나로 '앙리 할아버지와 나' 속 대사를 꼽으며 “성공과 실패가 다가 아니”라며 “사랑으로부터 생기는 가능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권혁재 기자
연기를 향한 고인의 사랑은 후배들에게도 아낌없이 돌아갔다. 세종대에 이어 가천대에서 10년 이상 영화예술학과 교수로 일하며 연기를 가르쳤다. 동료와 후배들에게도 일침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지난해 열린 제60회 백상예술대상에서 꾸린 특별무대를 통해 연극 무대 오디션에 접수한 참가자가 되어 자신의 연기철학을 전했다.
“배우로서 연기는 생명력”이라며 “연기를 쉽게 생각했던 배우들은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사라져버렸다”고 말한 그는 특별무대에서 누구냐 묻자 출연한 드라마·영화·연극의 개수를 통해 자신을 소개했다. 이순재의 출연작은 모든 매체를 합해 약 425편에 달한다.
당시 그는 ‘끝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열심히 한 배우로 기억해주시면 좋겠다”며 연극 ‘리어왕’의 한 장면을 연기했다. 그가 마지막까지 전하고 싶었던 말은 모두 무대 위, 카메라 앞에 남아있었던 셈이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층 30호실, 발인은 오는 27일 오전 6시20분이다. 장지는 이천 에던낙원이다.
더중앙플러스-천생 배우 이야기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29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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