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새 소설 『할매』 낸 황석영 “세상만사, 순환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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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전 서울 중구 한 식당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황석영 작가가 신간 『할매』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사진 창비

조용하게 말년을 보내고 마음에 드는 글도 쓰려고 군산을 갔더니, 광주(5·18 광주민주화운동) 이래로 또 문젯거리를 만났다.

9일 오전 서울 중구 한 식당에서 열린 장편소설 『할매』(창비)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황석영(82) 작가가 한 말이다. 그는 지난해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2020) 이후 5년 만에 내놓는 『할매』의 집필 계기를 밝히며, 군산시가 마련한 집필관에서 소설을 구상하는 동안 문정현 신부와 그의 동생 문규현 신부를 만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황석영 작가는 “문정현 신부가 은퇴 후 마지막으로 벌이고 있는 사업을 말해줬다”고 했다. 다름 아닌 300년 된 팽나무를 지키는 일이었다. 황 작가에 따르면 문정현 신부가 지키고 있다는 팽나무는 “미군 부대가 토지를 수용해 철거대상이 된 군산 하제마을에 위치한 서냥나무(신성한 나무)같은 존재”였다. 동생 문규현 신부는 새만금 방조제 공사를 반대하는 환경 운동을 하고 있었다. 황 작가는 “처음엔 무심히 넘겼는데, 형제와 대화를 나누고 갯벌을 걷다 보니 이 문제들이 보통 일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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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작가 신간 『할매』의 표지. 사진 창비

그렇게 환경 문제를 만난 황 작가는 “지구가 겪어내는 인간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작품으로 쓰고자 했다. 작가가 『할매』의 주인공을 600년 된 팽나무 ‘할매’로 정하고, 팽나무가 태어나기 전의 시간부터 상세히 그린 이유다.

소설은 팽나무의 씨를 품고 있던 개똥지빠귀 한 마리가 숲 속에 착지하는 장면을 묘사하며 시작된다. 새의 비행경로를 따르는 듯 보였던 소설은 책의 4분의 1 분량인 50페이지가 될 때까지 인물 한 명 없이 묘사를 이어간다. 황 작가로서 처음 도전하는 작법이다.

그는 “사람이 없는 서사를 쓰는 것이 처음이라 어색하고 힘들었다”며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작가인 나도 내 서사에 빠져들었다. 내가 이런 글을 써내는구나 하는 기쁨과 놀라움을 경험했다. 마치 헤밍웨이가 말년에 『노인과 바다』를 쓰며 느낀 자연과의 교감, 기쁨과도 상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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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작가는 "『철도원 삼대』를 쓸 때 불경과 시집을 많이 읽었다"며 "당시 존재와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는데,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관계에 대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할매』는 그렇게 시작했다"고 했다. 사진 창비

작가는 팽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으로 우뚝 선 시간을 조선 건국 초기인 1400년대로 묘사한다. 인간과 교감할 수 있고, 인간이 자아낸 비극을 목격하는 순간마다 팽나무엔 나이테만큼 짙은 기억들이 새겨진다.

이후 작가는 새만금 간척사업과 미군 기지 확장이 진행된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시간을 팽나무의 시선으로 담아낸다. 황석영 작가는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인연 혹은 관계를 다룬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세상만사는 관계의 순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을 쓰며) 이렇게 세상을 봤다. 『할매』에 나오는 여러 서사는 단순히 역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관계의 순환과 업(業)의 이전(移轉) 과정을 보여준다.”

지난 11월 황 작가는 82세의 나이로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이례적으로 수상소감은 “없다”고 했다. 그는 재차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60대와 70대 두 차례 훈장과 포상을 거절했다. 이번엔 여러 군데서 타진이 오고, 주변 조언을 들으며 훈장을 받기로 했다”며 “그럼에도 예술가는 국가권력과의 긴장감을 위해 거리를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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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작가는 "70대까지는 멀쩡했는데, 80대가 되니 기운이 떨어지더라"며 "지금은 오른쪽 눈이 안 보여 왼쪽 눈만 뜨고 글을 쓴다"고 했다. 사진 전명은

작가로선 “영원한 현역”으로 남는 것이 그의 목표다. “미수(88세)가 되려면 좀 남았는데, 그때까진 글을 써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아직 두세 편은 더 쓸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을 쓰기 힘들면 일기 형식으로라도, 죽을 때까지 글을 쓰려 한다.” 그는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란 말을 꺼내며 “백척이나 되는 높은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마음으로 쓰고 싶다”고 했다.

“다행히 『철도원 삼대』를 쓰며 한차례 위기는 넘긴 것 같다. 서사의 힘을 회복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힘으로 『할매』를 썼다. 할매라는 나무가 우리에게 삶과 죽음, 문명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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