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신고하면 길 있다"…베테랑 경찰이 말하는 교제폭력 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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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상황에서 최대한 침착하게, 어떻게든 신고만 해도 길이 있어요.

기동대 1년 근무를 제외하면 8년 내내 파출소에 근무하며 가정폭력·교제폭력 등 관계성 범죄 현장 최전선을 지켜왔던 양창모 서울 용산경찰서 한남파출소 경사는 지난 16일 교제폭력 사건에서 신고와 초기 대응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를 소개했다.

그는 “지난해 용산구에서 짧게 알고 지낸 남성에게 여성이 성범죄를 당할 뻔한 상황에서, 피해 여성이 기지를 발휘해 가족에게 전화하는 척 ‘오빠 난데 늦을 것 같아’ 내용으로 112 신고한 사례가 있었다”며 “접수원이 뒤에 남자 목소리를 포착하고 연계해줘서 즉각 출동해 분리조치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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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관 수기집 ‘여기, 우리가 있습니다’에 참여한 양창모 경사(용산경찰서)이 16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그러나 이런 대응이 언제나 가능한 건 아니다. 양 경사는 교제폭력의 반의사불벌죄 성격을 지적했다. 그는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심리적 지배를 받는 경우가 많아 진술만으로 현장에서 속전속결 피해 여부를 결정지으면 위험하다”며 “최소한 피해자와 기관을 연계해 조치가 이뤄질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비교적 최근까지 교제폭력에 대한 경찰 업무 분담도 제각각이었다. 양 경사는 “교제폭력 피의자를 경찰서에 인계하러 가면 어떤 건 형사과가, 어떤 건 여성청소년과가 맡았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현재 우리나라엔 신고나 형사 입건 건수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교제폭력·교제사망 공식 통계조차 없다. 일반 폭행 등으로 뭉뚱그려 분류된 사건들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분석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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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이 지난 16일 펴낸 '여기, 우리가 있습니다' 책 표지. '여청(여성·청소년)' 경찰관들의 수기 27편이 담겼다. 사진 경찰청

양 경사는 이런 경험을 토대로 지난 16일 경찰청이 펴낸 ‘여기, 우리가 있습니다’(여성·청소년 경찰 업무 수기집)에 수기를 실어 공저자가 됐다. 이 책에는 엄선된 여성청소년과 경찰들의 수기 27편이 담겼다.

이종석 서울 양천경찰서 신월1파출소 경감 역시 이 책의 공저자 중 한 명이다. 지역아동센터를 부러 찾아다닐 만큼 인권 이슈에 관심이 많은 이 경감은 “소외계층 아동 3명을 경제적으로 돕고 있는데, 인세로라도 후원 아이들 수를 늘릴 수 있을까 싶어 공모를 냈다”고 했다.

27년 차 지역경찰관 “교제폭력 법 없어 땜질식 대응”

27년 차 베테랑 경찰관인 이 경감은 교제폭력 대응의 제도적 한계를 현장에서 체감했다. 지난주에도 그는 “남자친구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다급한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피해 여성은 지난 1년간 교제폭력 신고만 10차례에 이르렀다. 그러나 현장에서 가해 남성에 대해 강제조치를 할 수 없었다. 스토킹 처벌법에 따라 강제조치하려면 지속적·반복적 행위여야 하는데, 신고 기록을 보니 피해자는 같았지만 가해 남성이 거의 매번 달랐다.

이 경감은 “교제폭력에 적용할 명확한 법이 없어 가정폭력처벌법의 사실혼 조항이나 스토킹 처벌법으로 땜질하는 게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지난 1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친밀한 관계에서 평생 한 번 이상 폭력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여성은 지난해 기준 5명 중 1명(19.2%)에 달했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발의된 교제폭력 관련 법안은 단 한 건도 국회 문턱을 못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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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관 수기집 ‘여기, 우리가 있습니다’ 에 참여한 이종석 경감(양천경찰서)이 16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2025.12.16.

관계성 범죄는 경찰관이 섣불리 개입했다간 소송의 위험도 따른다. 이 경감은 “가정폭력 현장에 출동했는데, 늦게 들어온 아들을 경찰관 앞에서 때리는 것을 제지하다가 과잉 진압 논란에 휘말려 결국 재판까지 갔다”며 “그때 이후로 적극적 조치가 부담되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이렇듯 수사의 ‘첫 단추’를 끼우는 지구대·파출소 현장에 법과 매뉴얼이 미흡한 현실 속에서, 이 경감은 수기집의 글을 이렇게 맺는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대안을 만들고 개선하기보다, 문제에 대한 비난의 대상을 찾기에 급급하고, 비난 후 금방 잊는 익숙함에 길들어선 안 된다. 그래서 소망해 본다. 사회도, 시민도, 경찰도 익숙함에 익숙해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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