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중국 간판 대학의 초라한 형편 [왕겅우 회고록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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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공부의 시작 / Settling Down to Study
1947년 여름 나는 다른 지원자 수백 명과 함께 바람 한 점 없는 강당에서 사흘 동안 땀 흘리며 입학시험을 치렀다. 열대지방에서 온 내게 더위가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지만 불편하기는 했다. 전국 여러 곳에서 동시에 치러진 이 시험에 응시자가 몇 명이었는지 몰라도, 경쟁이 매우 치열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걱정과 흥분이 엇갈리던 며칠이었다.
중국어 시험의 논술 부분을 출제자 요구대로 고전한문으로 쓰기는 했는데, 인용된 공자 말씀의 취지를 잘못 파악했다. 과학과 수학 시험은 힘들었고, 정답을 써낸 것이 얼마나 되는지 자신이 없었다. 결과가 나와 외국어학과 합격자 24명에 끼인 것을 알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영어 시험 답안지를 누군가가 보고 끌어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에 들으니 그 해 뽑은 신입생이 4백 명뿐이라고 했다.
당시 국립대학의 방침은 모든 학생을 기숙사에 넣고 기본비용을 지원해주는 것이었다. 중앙대학이 그해 학생을 적게 뽑은 것은 경제 혼란과 재정 위기 때문이고, 내전의 전국 확산에도 이유가 있었다. 게다가 학교가 충칭에서 막 돌아와 기숙사를 비롯한 제반 시설이 부족했다. 종합대학답게 많은 학과와 교수진을 가진 중앙대학이 중국에서 제일 큰 학교였지만 학생 수는 학부와 대학원을 합쳐 약 4천 명에 불과했다. 여러 해 전쟁에 시달린 국가의 회복을 위한 필요에 영 미치지 못하는 숫자인데, 정부의 간판격 대학 형편이 그러했다.
우리 기 신입생들에게는 대접이 좋았다. 1학년 동안은 본교에서 2마일쯤 떨어진 딩자챠오의 기숙사에서 지냈다. 약 1백 명씩 들어가는 남학생 기숙사 3개 동이 있었다. 몇 안 되는 여학생들 숙소는 더 먼 곳에 있어서 강의실이나 학교 행사에서 보고, 주말에 시내나 근교에 외출할 때 보기도 했다. 우리 기숙사에는 큰 공동욕실-세탁장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더블침대가 줄지어 있었다. 학생 여덟 명이 침대 넷을 공유했고, 침대 사이에 책상들이 놓였다.
우리 조 여덟 명 중 하나는 공과, 둘은 중국어학과, 하나는 철학과였다. 그리고 외국어학과 급우가 둘 있었는데 하나는 쓰촨 출신 제대군인으로 억센 쓰촨 방언을 썼다. 또 하나는 학까였는데, 말라야에서 늘 보던 광둥이나 푸젠 출신 학까가 아니라 쟝시성 출신이라고 했다. 그 친구 학까어를 알아들을 수 있어서 반가웠고, 그 친구는 내가 표준 메이셴(梅縣) 학까어를 쓰는 것을 보고 놀랐다.
기숙사 안에 1백 개 젊은 몸뚱이가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방안이 더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저녁마다 동네 음식 장사들이 군밤이나 삶은 땅콩 같은 것을 팔러 와서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았다. 부지런한 장사꾼 하나는 독한 고량주를 덥혀서 가져왔다. 돈이 없는 학생들이었지만 가져오는 음식 값이 쌌다. 가장 인기 있는 밤참은 땅콩 안주의 고량주였다. 잠자리 들기 전에 우리 뱃속을 덥혀 주었다.
책상 위의 조명이 괜찮았고, 어두운 후에 우리 할 일은 독서와 이튿날 강의 준비뿐이었다. 가장 큰 불만은 음식에 있었다. 수백 미터 떨어진 식당에서 한 테이블에 여덟 명씩 앉아 네 가지 음식과 국 한 그릇으로 식사를 했다. 밥은 따로 있어도 여덟 명 굶주린 청년에게 음식이 충분할 때가 없었다. 해결할 길이 없는 문제였고, 이 때문에 학교당국과 충돌도 있었다. 학생들에게 식사는 무료였고 주어진 예산으로 최선의 식사를 제공하도록 식당 운영자들을 조르는 것이 학생회의 주요 임무였다.
분교에서 지내는 우리 신입생들도 본교의 상급생들이 빈부 문제 등 국가적 과제를 위해 적극적으로 운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직접 참여하기에는 좀 너무 먼 곳에 있었다. 그 운동 내용을 우리는 궁금해하며 이듬해 본교로 가서 우리도 참여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급생은 거의 모두 충칭에서 다니다가 온 사람들이었고 내전에 공공연히 반대했다.
내가 난징 오기 직전인 1947년 여름에 학생운동 지도자 몇이 대규모 시위 때문에 체포되고 퇴학당한 일이 있었다. 그때부터 가두시위는 수그러들었으나 본교 교정의 항의 집회는 계속되었다. 우리 신입생 중에도 비판의식이 강한 친구들이 있었지만 서두르지 않고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우리 비판의식은 음식에 쏠렸다.
나는 식당에서 배불리 먹을 때가 없었다. 잽싸게 먹는 재간을 익힌 친구들이 고기와 채소를 먹어 치웠다. 밥에 든 돌을 골라 뱉어내는 일이 내게 특히 힘들었다. 실수로 이빨이 깨질까봐 겁이 났다. 입안에서 밥을 굴리다가 돌을 쉽게 가려내는 친구들도 있었으나 그 재간을 배우지 못한 나는 식사가 늦었다.
값싸고 영양 풍부한 식품을 동네 시장에서 살 수 있고 더러는 배달까지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런 식품 중에는 큰 깡통에 든 버터와 아이스크림 파우더도 있었다. 유엔구제부흥사업국(UNRRA)에서 전쟁 이재민을 위해 보낸 깡통이었다. 시골 지역에 배포된 것인데 일반 중국인은 유제품에 익숙지 않아서 부지런한 장사꾼들이 헐값으로 거둬 와 난징과 상하이 같은 도시에서 팔았다. 나 같은 해외 출신이나 도시민들은 잘 먹었고, 내게는 안성맞춤 간식이었다. 버터는 말라야에서 먹던 것보다 좋은 고급품이었고 아이스크림 파우더는 값이 형편없이 쌌다. 냉장고 가진 사람도 별로 없고 어떻게 먹을지 아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파우더를 뜨거운 물에 풀어 뻑뻑한 음료로 만들어 먹으면 밤에 몸을 따뜻하게 해줬다. 몇 달 동안 버터와 아이스크림 파우더를 실컷 먹으면서 체중이 많이 늘었다.
부근의 창고 몇 동이 강의실로 개조되어 있었다. 문학부 강의실은 기숙사에서 가까운 편이었다. 이과와 공과 학생이 더 많았고, 그 강의실과 실험실은 이 분교 캠퍼스의 한쪽에 모여있었다. 기초교양 과목이 네 개였다. 중국어문학, 중국사, 윤리학, 그리고 ‘삼민주의’란 이름의 정치교양 과목이었다.
외국어학과 학생 대부분은 영어 전공이었고 일본어와 러시아어 전공이 몇 있었다. 제2외국어를 하나 택해야 했고 나는 독일어를 택했다. 매주 6일간의 일정은 간단했다. 이른 아침의 체육시간에 이어 오전수업과 오후수업이 있었다. 저녁 후에는 각자 알아서 놀거나 공부했다. 일요일에는 겨울 추위가 닥치기 전까지 가까운 성벽 밖의 현무호로 산보를 많이 다녔다. 기숙사 안에서 친구들 사귀는 것 다음으로 첫해 동안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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