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눈 내린 겨울처럼…색을 뺀 장욱진 붓장난ㆍ먹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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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의 먹그림으로 만든 8폭 병풍이 전시된 경기 양주시립장욱진 미술관의 ‘번지고 남아있는: 장욱진 먹그림’. 사진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먹그림(墨畵)을 그려봤습니다. 한 가지에 고착된 작업이 좋지 않아 유화 드로잉 외에 여러 가지에 손대봤는데 그리는 맛이 틀려 다 재미있어요. (「중앙일보」 1979년 10월 9일자)

1979년 현대화랑 전시 때 먹그림 18점을 처음 공개하면서 장욱진(1917~90)이 한 말이다. 그가 동양화용 붓으로 화선지에 그림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78년 무렵. 1977년 책방 운영에서 손을 뗀 아내 이순경에게 문방사우를 마련해 주면서 불경을 베껴 쓰는 사경(寫經)을 권했지만 1년 넘게 손대지 못하는 걸 보고 ‘어렵게 여길 게 있겠는가’ 하며 화가가 붓으로 먹을 찍어 그리며 시범을 보인 게 계기였다. 『그 사람 장욱진』의 저자 김형국이 이순경에게 들은 얘기다.

마지막 작업실인 용인 기흥 양옥,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 두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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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무제, 종이에 먹, 27.5x24㎝, 1982. 사진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먹으로 그림 그리는 작업을 화가는 스스로 ‘붓장난’이라고, 그런 붓장난으로 얻어진 그림을 ‘먹그림’이라고 불렀다. 1940년대 도쿄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나온 뒤 김환기ㆍ유영국과 신사실파를 결성, 한국적 추상화를 확립한 장욱진이다. 동양화도 서양화도 아닌, ‘먹그림’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실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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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이 1985년 부채에 그린 먹그림. 사진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장욱진의 먹그림이 경기도 두 곳에서 전시 중이다. 생애 마지막을 보낸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양옥에서 열리는 ‘장욱진의 붓장난’과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의 ‘번지고 남아있는: 장욱진 먹그림’이다. 규모는 작지만 장욱진과 친밀한 장소에서 그의 먹그림만으로 꾸린 드문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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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이 만년에 기거하며 그림을 그린 용인 기흥 한옥의 설경. 사진 장욱진미술문화재단

화가는 새벽녘에만 먹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했다.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수안보의 농가를 고쳐 지내던 1979~82년 무렵 먹그림을 집중적으로 그렸다. 수묵화처럼 맑게 희석한 유화도 이 무렵의 작품이다. 먹그림은 한동안 뜸하다가 만년에 다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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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의 마지막 작업실이 있는 용인 장욱진 고택의 양옥. 용인=권근영 기자

장욱진 그림은 흔히 그가 머물던 공간을 중심으로 덕소 시기(1973~75), 명륜동 시기(1975~79), 수안보 시기(1980~85), 용인 시기(1986~90)로 나뉜다. 화가에게 그만큼 공간이 중요했던 셈인데, 수안보 시기 먹그림 스타일의 정점을 이뤘다면 69세 이후 용인으로 옮겨서는 이전의 다양한 경향을 아우르며 작업 폭을 넓혀 나갔다. 마북리의 오래된 한옥 고택에서 지내면서 화가는 "설계도 없는 집을 지어 보겠다"며 미국 콜로니얼 스타일의 양옥을 지었다. 1989년의 일이다. 1953년 부산 피란지에서 그린 초기작 ‘자동차 있는 풍경’ 속 집을 꼭 닮았다. 화가의 마지막 집이었다. 그림 같은 집에서 1년 반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용인 장욱진 가옥은 2008년 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문화재 지정이 지역 개발을 저해한다는 일부 주민들의 거센 반대가 있었지만 유족들의 의지로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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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의 용인 양옥은 1953년 피란지 부산에서 그린 '자동차 있는 풍경' 속 집을 닮았다. 사진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장욱진이 활동하던 1960~80년대는 앵포르멜(비정형 추상미술), 단색조 회화, 민중미술 등 거대 담론이 오가며 100호 이상 대작들이 유행하던 때였다. 손 뻗어 그릴만한 크기의 작은 그림에 천착해 온 장욱진의 세계가 유별나다. 이들 작은 그림은 그가 기거하던 집에 걸렸을 때 가장 맞춤하다. 한옥 전시실에 판화 8점, 양옥에 먹그림 26점과 8폭 병풍이 전시 중이다. 달마, 거북이, 물고기, 뒷짐 진 노인, 날아갈 듯한 모습의 아이 등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이미지를 종이에 수묵으로 만날 수 있다. 양옥 2층의 마지막 작업실도 화가가 바닥에 앉은 채 붓과 벼루를 사용하던 그대로 남겨뒀지만 비공개다. 내년 1월 3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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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장욱진 고택 양옥 2층에 그대로 보존돼 있는 마지막 작업실. 용인=권근영 기자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에서도 먹그림 40여점을 모은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그의 먹그림을 민화ㆍ불교ㆍ일상 등 세 가지 소개로 구분했다. 논밭과 시골 초가집이 펼쳐진 풍경화, 가족들이 후에 8폭 병풍으로 표구한 작품 등이 나왔다. 지난해 개관 10주년 학술대회 ‘다시, 장욱진을 보다’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 전시다. 당시 최경현 천안시립미술관장은 "장욱진은 서양화와 동양화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았다"며 "수묵으로 그린 자신의 그림을 수묵화가 아닌 새로운 장르 ‘먹그림’으로 칭했다"고 설명했다. 내년 4월 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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