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별 후 잠 못드는 환자…영국은 약 대신 사람 처방했다 [관계빈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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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대표적인 사회적 처방 사례인 정원 가꾸기. 활동 참여시 동행하거나 그만 두려할 때 대체 프로그램 등도 찾아준다. 영국 정부가 발간한 외로움 대책 연례 보고서(2023년)에 담긴 사진. 영국 외로움 대책 보고서
영국 런던의 1차 진료(GP) 센터를 찾은 60대 여성이 "요즘 부쩍 기운 없고 잠이 안 온다"고 호소했다. 의사는 약을 처방하기 전 옆방의 '링크 워커(Link Worker)'에게 그를 보냈다. 링크 워커와 1시간 상담했다. 불면증의 원인은 사별 후 엄습한 지독한 고립감이었다. 링크 워커는 지역 합창단, 정원 가꾸기 모임 활동을 '처방'했다. 첫 모임 때는 동행해 적응을 도왔다. 중간에 그만두자 대체 프로그램을 찾아줬다.
'사회적 처방'은 영국 관계빈곤 대책의 핵심이다. 영국은 2018년 세계 최초로 외로움부 장관을 임명했다. 사회적 관계망 약화를 국가가 챙겨야 할 의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7년이 흐른 지금, 영국의 실험은 성공했을까. 중앙일보는 지난달 영국 국립보건서비스(NHS) 소속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문승연씨를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문 전문의는 "영국은 외로움을 개인의 취약점이 아닌 공중 보건 이슈로 끌어올려 본질적인 변화를 시도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영국 정부는 전국 라디오·텔레비전 방송 등에 송출되는 캠페인을 통해 '정신건강을 위해 잠시 멈춰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말해보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특히 'Mental Health Minute' 캠페인에는 윌리엄 왕세자-케이트 미들턴 부부 등 왕실도 참여했다. 사진 영국 왕실 홈페이지
영국 대책의 목표는 낙인 줄이기, 지속적인 변화, 철저한 근거 강화이다. '멘탈 헬스 미닛(Mental Health Minute)' 캠페인 등으로 "외로우면 도움을 청해도 괜찮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여기에는 영국 왕실이 참여해 힘을 실었다. 문 전문의는 "환자들이 진료실에서 '관계가 끊겼다' '대화할 사람이 없다' 라고 자연스럽게 말하게 됐다"며 "의사가 진료 기록에 외로움·고립이라고 명시하는 빈도도 증가했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기관이 정책을 수립·실행할 때엔 사람 간 연결 강화를 고려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가령 교통부는 거동이 불편한 이들을 위해 '동행 택시'를 운영하는 식이다. 통계청(ONS)은 외로움 표준 지표를 개발해 매년 점검한다.

영국 정부가 고립 노인에게 이동 수단을 제공하는 '해피 캡(Happy Cab)' 서비스. 영국 정부가 발간한 외로움 대책 연례 보고서(2023년)에 담긴 사진. 사진 영국 정부
사회적 처방의 효과가 좋다. 전담 인력인 '링크 워커' 약 3500명이 1차 진료센터 등에 배치돼 지역사회 모임 등에 연계해준다. 연간 130만 건 처방한다.
영국 '국립 사회적처방 아카데미(NASP)'에 따르면 사회적 처방 시행 후 GP(일반의사) 방문이 12%, 2차 진료 비용이 최대 20% 줄었다. '항상 또는 자주 외로움을 느낀다'는 응답자 비율이 2023~2024년 7.1%에서 2024~2025년 6.6%로 약간 줄었다.
박경민 기자
문 전문의는 "사회적 고립은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사회적 처방이 자살 등을 예방하고 나아가 국가 의료비 절감에 기여한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2021년 고독·고립 대책 담당 장관을 신설하고, 미국도 2023년 공중보건서비스 수장이 외로움을 '전염병'으로 규정했다.
박경민 기자
한국은 2020년 고독사 예방법을 제정해 고독사·자살에 대응한다. 그러나 이의 전 단계인 사회적 고립에 대한 '사회적 처방'은 미비하다. 문 전문의는 "고독사·자살의 원인이 되는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개인을 사회로 다시 연결해주는 정책을 강화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문 전문의는 한국인의 관계빈곤 심화 주범으로 ▶급격한 개인화 ▶장시간 노동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회적 수치감' 등을 꼽았다. 문 전문의는 "한국의 기업이나 보건소·의원 중심의 사회적 연결 지원 인력 배치 등을 고민해보자"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국 국립보건서비스(NHS) 노스런던 정신건강보건국 소속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문승연(캐롤린 문)씨. 사진 문씨 제공
"영국의 교훈은 외로움을 말하게 하고, 연결을 처방하고, 그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데 있습니다. 외로움을 개인의 약점이 아니라 연결 가능한 사회 인프라 부족 문제로 바라보고, 국가가 품어야 할 시대적 책무로 다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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