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비공개 북한 문제 협의…만나고 숨긴 한국과 러시아의 ‘동상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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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조선중앙TV는 지난 13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공병부대원들의 귀국을 환영하는 축하공연에서 러시아 파병 공병부대인 제528공병연대의 작전모습 사진을 공개했다. 조선중앙TV =연합뉴스

최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한·러 정부 당국자가 비공개로 만났지만, 양국이 이를 철저히 함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종전 이후를 대비하자는 공감대는 형성됐지만, 북한을 의식해 서로 다른 이유로 면담에 대한 확대 해석을 경계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21일(현지시간) “러시아 측은 한국 측과 어떠한 협의도 진행하지 않고, 평양과 서울 간 양자 관계에 관한 문제는 물론 ‘북한 핵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하지 않는다”며 “러시아에는 어떠한 ‘북한 핵 문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한국 정부 당국자가 올레그 부르미스트로프 외무부 북핵 담당 특임 대사 등과의 비공개 면담에서 북한 문제를 비롯한 현안을 논의했다는 보도를 부인하는 취지였다. 자하로바 대변인은 “한국 외교부 대표단이 러시아 학계, 특히 에너지·안보센터의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 업무 상 출장을 양국 외교 당국 간의 공식 협상으로 둔갑시키려는 서툰 시도가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한국 측은 면담 여부를 공식적으로 확인하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조현 외교부 장관은 22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5년째 전쟁을 계속하고 있고, 국제적으로 제재 대상이라 러시아와 대화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다”면서도 “우리의 실질적 국익, 기업 활동이나 국민 보호 등에 있어 대화 채널을 잘 유지하고 있다”고만 밝혔다. 기본적인 영사 분야 협력을 위한 접촉이 이뤄지고 있는 수준이라는 설명이다.

종전 이후 한·러 관계 변화 대비 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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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 외교부 장관이 지난 9월 2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과 회담,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 외교부

양국 간 면담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뒤 한·러 관계가 변화할 가능성에 대비하는 차원으로 보인다. 다만 면담 여부 자체를 침묵하는 배경에는 양측의 다른 속내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한국은 한·러 관계를 개선해 종전 이후 북·러 밀착을 견제하겠다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이후 “한·러 관계의 조속한 개선을 바탕으로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를 펼쳐 평화와 국민 생활을 지키겠다”고 밝혔다. 북한이 파병을 계기로 러시아 측에 요구하고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핵추진 잠수함 관련 기술 이전을 막아야 한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 정부 소식통은 “북한이 상대적으로 열세인 공군, 위성, ICBM 관련 기술을 파병의 대가로 받지 않도록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진 만큼 대북 대화 재개를 위한 ‘바늘구멍’을 러시아를 통해 찾으려는 시도란 해석도 있다. 이렇다 보니 사전 물밑 접촉이 공개되는 것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대다수 유럽 국가와 대립 중인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한국에 우호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종전을 앞두고 전임 정부와 달리 유화적 제스처를 보이는 한국과 대화 채널을 열어두는 게 낫다는 판단에 대화에 응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러시아 측은 북한의 비핵화를 전제로 한 대화에는 참여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자하로바 대변인은 21일(현지시간) “소위 ‘비핵화는 새로운 지정학적 환경에서 의미를 잃었다”며 “러시아 측은 북한과 서울 간의 관계에서 어떠한 중재도 배제한다”고 밝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북한을 사실상의 ‘핵보유국(nuclear power)’으로 인정하는 발언을 이어가는 가운데 남북 간 가교 역할은 하지 않겠다고 사전에 선을 그은 셈이다.

외교가에서는 러시아가 ‘혈맹 관계’로 발전한 북한을 의식했다는 의견이 많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12일 러시아 쿠르스크에 파병됐던 공병부대 환영식에서 희생자 수까지 공개 거론했는데, 러시아 파병을 이어가겠단 뜻을 드러낸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이번 면담은 북한과 관련해 양국 간 입장을 확인하는 정도에 그쳤을 것으로 보인다”며 “러시아는 한국 측 제안에 수동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뜻을 밝힌 셈이다. 한국은 대북·대러 제재가 진행 중인 상황을 고려해 속도를 조절하면서 관계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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