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홍위병의 표적 됐다, 어느 젊은 철학도의 죽음 [왕겅우 회고록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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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강의는 쉬웠지만, 중국에서 중학교를 다니지 않은 내게 다른 과목들은 낯설었다. 중국어문학과 중국사도 힘들었으나 진짜 힘든 것은 윤리학이었다. 담당 교수는 광둥 출신에 페루 출생으로 유럽에서 공부한 독일철학 전공자였다. 칸트 윤리학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분으로, 강의시간 내내 그것을 중국어로 설명해 주었다. 나는 솔직히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철학 전공의 한 친구가 열심히 들으면서 그 설명이 헛소리가 아니라고 보장해 주었다.

나는 그분이 라틴아메리카 화교 출신이라는 사실에 더 흥미가 끌려서 나도 화교 출신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어려운 유럽 관념들을 쉬운 중국어로 풀어내는 과업에 너무 몰두해서 가르치는 학생이 어떤 학생인지는 신경 쓸 여가가 없는 것 같았다. 강의 끝날 때마다 그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을 느낄 것 같았다. 나로 말하자면 한 학기 강의로 윤리에 관한 생각이 더 밝아진 것 같지 않다.

윤리학 강의를 알아들은 철학과 친구는 이름이 양차오(楊超)였다. 그는 중국 고전에 통달했을 뿐 아니라 불교 경전과 도가 서적도 많이 읽은 친구로, 칸트에 관한 강의 내용을 중국인이 익숙한 관념들과 비교해 보곤 했다. 열정적이고 사랑스러운 친구였다. 우리 중 학식이 가장 넓은 친구였고, 그런 친구와 함께 지내면서 나 자신이 얼마나 무식하고 미련한지 깨우칠 수 있었다. 그 친구가 철학의 몇 개 분야에 얼마나 정통한지 모두 탄복했다. 마르크스 저술을 읽어봤다고 공언하고 공산주의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으로 보이는 데 우리 모두 놀랐다.

후에 들으니 공산당의 지도적 철학자 허우와이루(侯外廬, xxxx-xxxx)가 양차오의 논문 한 편을 보고 감명받아 상하이에서 불러들여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자기가 맡은 철학 부문에 넣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양차오는 허우 교수의 〈중국사상통사〉 제3권의 저술을 도왔다. 불교와 도가 사상이 고조된 6조시대 사상을 서술한 권이다.

유감스럽게도 1968년 문화혁명 중 허우 교수와 그 연구팀이 비판받을 때 정직성을 버리지 못한 양차오는 저우언라이 수상을 공격하려는 ‘좌경’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좌경을 고발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홍위병의 표적이 되어 반당분자(反黨分子)로 고발당하고 핍박 끝에 자살했다. 같은 팀에 있다가 살아남은 몇 사람이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이 학자의 희생을 슬퍼하는 글을 썼다. 그런 글을 읽으며 양차오가 새로운 사상에 마주치거나 논점을 밝혀내는 새로운 방법을 찾았을 때 환하게 빛나던 얼굴이 생각난다.

봄이 오자 우리 1학년 중 활동적인 축은 주말에 상급생들의 토론에 끼기 시작했고 한번은 큰 가두시위에 따라나선 일도 있다. 시위대는 처음에 조용히 걸어가다가 정부 건물 하나에 가까이 이르자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구호가 적힌 종이쪽지를 받아가지고 있었다. 거기 적힌 내용을 다 기억하지 못하나 미국의 도움을 받아 중국 애국자들을 핍박하는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도 있었다. 도로변에 무장경찰이 늘어서 있었고 기마경찰도 있었으나 그날은 아무런 충돌도 없었다. 길거리를 두 시간쯤 행진하다가 본교 캠퍼스로 돌아왔다.

그보다 즐거운 시간도 있었다. 우리 외국어학과 학생 중에 대중음악을 좋아하는 상하이 출신 몇이 있었다. 그들이 합창대를 조직해 요한 슈트라우스의 “푸른 다뉴브”나 “다뉴브강 물결” 같은 고전가요를 부르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었다. 매주 두 차례씩 모여 연습하면서 조금 더 어려운 슈베르트 작품을 거쳐 모차르트, 베르디, 푸치니 등의 오페라에 나오는 유명한 아리아로 나아갔다. 아리아는 내게 전혀 새로운 영역이어서 제대로 감상하는 데 꽤 많은 공부가 필요했다. 다행히 합창대 지도자들이 많은 참을성을 보여주었다.

상하이 출신 일부 학생들의 문화적 서양화 수준에 놀랐다. 1학년 때 그 친구들과 어울린 경험이 이듬해의 본교 생활 적응에 도움이 되었다. 본교에서는 캠퍼스 가운데 있는 서양음악원을 아침저녁으로 지나다녔는데, 이따금 발길을 멈추고 학생들이 연습하는 악기 소리나 서양 오페라의 아리아 소리를 들으며 그들의 재능을 부러워하곤 했다.

여름방학이 끝난 후 우리는 2학년이 되어 도심에 가까운 청셴제 캠퍼스로 옮겨갔다. 5백 미터쯤 떨어진 커다란 벽돌건물 기숙사에서 살았는데 모든 시설이 딩장챠오보다 좋았다. 침대 네 개와 그 사이에 두 줄로 놓인 책상을 여덟 명이 함께 쓰는 것은 그대로인데, 방이 따로 되어 있었다. 전해부터 기숙사와 강의실에서 어울려 온 사이였지만, 새로운 환경 속에서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다.

매일 아침 캠퍼스로 향하는 좁은 길을 걸어가며 두 줄로 늘어선 신간 서점을 지나갔다. 책 살 돈 있는 학생은 별로 없어도 훑어보는 것이 즐거웠고, 책 읽어보는 것을 주인이 말리지 않는 것이 놀라웠다. 몇 시간씩 서서 통째로 책을 읽는 학생들도 있다고 했다. 나나 내 친구들에게 그런 열성은 없었지만 시간 있을 때 와서 한 챕터쯤 읽고 싶은 마음은 들었다.

외국어학과 우리 학년의 여학생 넷은 모두 영어 전공이었다. 하나는 충칭, 하나는 상하이, 하나는 난징 출신이고, 또 하나 둥베이 출신은 고향이 내전에 휩싸여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한둘씩 많아서 나를 동생 취급했다. 2학년이 되어서는 거의 모든 강의를 함께 들으며 더욱 가까워졌다. 모두 언어 능력에 주로 관심이 있었고 읽기와 쓰기를 다 잘했다. 문법 지식은 나보다 나았으나 문학의 역사를 파악하는 데는 남학생들 도움이 필요했다.

남경 함락 후 그들의 향방이 궁금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넷 다 베이징 외국어대학으로 전학했었다. 하나는 러시아어를 공부해서 중앙편역국(中央編譯局)에서 일했고 또 하나는 외교부에 들어갔다. 다른 두 사람도 정부 부서에서 영어 능력을 필요로 하는 직책을 맡았다. 그중 한 사람을 40년 후에 만났을 때, 그 사람이 학교 함께 다니던 시절에도 공산당 당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중앙대학의 평판이 높은 이유도 차츰 실감하게 되었다. 교수진에 명성 높은 학자가 많았고 유럽과 미국 명문 대학에 있는 학과들을 그 교수들이 담당했다. 이제 영국문학 강좌를 듣기 시작하는데, 시문학에는 밀튼에서 포프까지 고전주의 작가들을 다루는 강좌와 낭만주의 작가들을 다루는 강좌가 따로 있었다. 산문 분야에는 디포에서 필딩까지 초기 소설을 다루는 강좌와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디킨스와 하디 등 19세기를 다루는 강좌가 따로 있었다.

슬프게도 우리의 2학년 공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개학 후 두 달이 안 되어 내전이 장강 건너편까지 번져 왔다. 학교는 문을 닫고 학생들은 나와야 했다. 나는 말라야로 돌아갈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친구들과도 교정과도 정이 깊이 들어 있었다.

[역주: 국공내전 초기에는 국민당군이 압도적인 우세였다. 1946년 7월 국민당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었고 1947년 3월 옌안 함락에 성공했다. 그러나 곧 공산군의 대규모 반격이 시작되어 1947년 8월 이후 료심회전(遼瀋會戰), 회해전역(淮海戰役), 평진전역(平津戰役) 등 큰 전투에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1948년 초에는 국민당군이 장강 이남으로 밀려났고 1948년 4월 공산군의 도강 이후로는 전쟁이라기보다 소탕 단계로 접어들었다.]

새 기숙사에서 지내는 몇 달 동안 나는 식품위원 책임을 맡았다. 직원들이 재주피우지 않게 감독하는 것이 위원회의 임무였다. 위원 둘이 직원들을 따라 쌀 창고에 가서 무게를 속이려고 돌이나 모래를 섞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몇 마일 떨어진 교외로 나가 물건을 받아 주방까지 가져오는 과정을 감시했다. 월말에는 정확한 숫자의 포대가 창고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할 책임이 있었다. 쌀 창고로 포대를 가져가는 데 손수레 세 대가 필요했다. 우리 위원회의 임무가 불과 한 달 만에 끝난 것이 다행이었다.

정부에 대한 실망이 깊어지고 있던 동료 학생들과 함께 “작전”을 목격한 일이 두 차례 있었다. 첫 번째는 장제스가 미국에 의지해 공산당을 적대하는 데 반대하는 시위를 하러 많은 학생이 두 줄로 행진해 나갔을 때였다. 종래의 시위에 비해 소란스럽고 구호가 거칠었다. 결국 경찰에 진압 명령이 떨어졌고 학생들의 함성 속에 기마경찰대가 덮치고 강제 해산에 나섰다. 나는 다친 데 없이 돌아왔는데, 병원 가서 치료받은 학생이 몇 있었다고 한다.

두 주일 후 저녁식사 후에 학교 대강당에서 연설이 곁들인 농성대회가 있었다. 중심 주제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시국에 대한 상급생들의 주장을 듣고 싶어서 친구들과 함께 갔다. 한창 진행 중에 전등이 모두 나갔다. 모두 일어나 출구로 향했고, 나는 가까운 옆문으로 나갔는데 중앙 출구로 나간 학생들은 기다리고 있던 청년들에게 몽둥이로 두들겨맞았다. 나중에 들으니 반정부활동 탄압을 위해 국민당 청년부에서 보낸 깡패들이었다고 한다. 이 일은 내게 두려움을 주기보다 정권이 막장에 이르렀다는 확신을 주었다. 그러나 그후의 곡절을 알아볼 시간이 없었다. 곧 학교 문을 닫았고 떠날 수 있는 학생들은 집으로 떠났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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