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잿가루 된 돈에 분노했다…이란, 3년만 최대 규모 반정부 시위
-
14회 연결
본문
레자 샤, 편히 잠드소서.
30일(현지시간) 이란 테헤란 거리에 금기어가 울려 퍼졌다. 1925년 샤(왕)에 오르고, 35년 국호를 현재의 이란으로 정한 팔라비 왕조의 개창자 레자 팔라비(레자 샤)다. 79년 이슬람혁명은 그의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를 폐위하고 이란에 현재의 신정(神政) 공화국 체제를 세웠다. 아야톨라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를 비롯한 현 지도부에겐 ‘타도의 대상’인 레자 샤를 시민들이 수도 한복판에서 연호한 것이다.

지난 29일 이란 테헤란 중심부의 한 고가도로 위에서 시민과 상인들이 경제난과 생활고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경제난에 지친 이란 시민들의 항의 시위가 불붙듯 번지고 있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지난 28일부터 시작된 시위는 사흘째인 이날 테헤란에선 테헤란대 등 8개 대학과 시장으로 확산됐다. 이스파한, 시라즈, 마슈하드, 야즈드 등 전국으로도 번지고 있다고 이란 IRNA통신이 전했다. CNN은 “2022년 9월 히잡을 잘못 썼다는 이유로 도덕 경찰에 체포된 뒤 의문사한 마흐사 아미니(사망 당시 22세) 사건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고 전했다.
시위대의 비판 대상은 마수드 페제시키안 대통령을 넘어 89년부터 권좌를 지키고 있는 하메네이로 향하고 있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수위 높은 반정부 구호가 나오며 강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테헤란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이 ‘독재자에게 죽음을’ 등의 구호를 외쳤다”고 전했다.
소셜미디어에선 시위 도중 한 참가자가 테헤란 시내 도로에 앉아 오토바이를 탄 경찰과 대치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도 퍼져나갔다. 일각에선 이를 중국의 천안문 시위 당시 맨몸으로 진압군 탱크에 맞선 '탱크맨(Tank Man)에 빗대고 있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시위의 원인은 통화가치 폭락으로 인한 생계난이다. 이란 통화인 리알화의 달러당 환율은 이날 145만 리알까지 떨어졌다. 2015년 핵합의(JCPOA) 타결 무렵 달러당 3만2000리알 안팎이던 때와 비교하면 10년 만에 44분의 1로 쪼그라든 셈이다.
리알화 폭락은 장바구니 물가를 강타했다. 이란 시위대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우유도 비싸서 못 산다”며 “치즈값은 몇 주 만에 600만에서 800만 리알로 뛰어 구매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리알로 받은 돈이 장을 보는 순간 재처럼 사라진다”는 하소연도 나왔다. 환율을 감당 못 한 일부 상점은 우유 등의 가격표를 달러로 매기고 있다고 한다.
이란 경제가 무너진 배경으론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JCPOA를 탈퇴한 후 이어진 제재가 꼽힌다. 원유 수출이 여의치 않자 외화 유입에도 차질을 빚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9월 영국·프랑스·독일 주도로 유엔 차원의 핵 관련 제재가 복원(스냅백)됐다. 외화가 마르자 환율이 흔들리고 수입 물가가 오르며, 타격이 생활 물가로 이어진 것이다.
시위대 “하마스·헤즈볼라 말고 우리 챙겨라”

이란 테헤란에서 20일(현지시간) 환전상이 100달러 지폐를 들어 보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불안한 대외 관계도 이란에 큰 짐이다. 지난 6월 이스라엘과 벌인 ‘12일 전쟁’과 미국의 핵시설 공습은 가뜩이나 부족한 해외 교역에 악영향으로 작용했다. 미국의 압박은 여전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9일 “이란이 핵 시설 재건과 미사일 전력을 재비축한다면 (6월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시위대는 이란 정부의 외교 정책을 직격하고 있다. 이스라엘과의 다툼 등 쓸데없는 데 돈 쓰지 말고 우리부터 챙기라는 요구다. 반체제 성향 매체 이란인터내셔널은 테헤란 샤리프 공대 등에서 “가자지구도, 레바논도 아니다. 내 목숨은 이란을 위해”라는 구호가 나왔다고 보도했다. ‘저항의 축’이라 불리는 하마스·헤즈볼라 등 역내 반(反) 이스라엘 무장세력을 지원하기보다 국민 생계를 우선하라는 요구다.
히잡 허용에도 경제 폭망엔 소용없어
페제시키안 대통령은 X(옛 트위터)에 “국민 구매력을 유지하려는 조치를 계획 중. 내무장관에 시위대 요구를 경청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지만, 성난 여론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란 평가가 나온다. 이란 정부는 대규모 시위를 막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지켜오던 히잡 단속을 사실상 허용하는 수준으로 완화하는 등 민심을 달래왔지만 악화한 경제 앞에선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제 상황이 빠르게 나아지지 않으면 시위가 36년간 이어진 신정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하메네이는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 대신 강경 보수 진영과 일부 국영 매체에선 시위 배후로 외부 세력을 지목하고 있다. 국영 타스님 통신은 “시오니스트(유대인 민족주의자) 언론과 인사들이 혼란과 폭동을 선동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당국이 언제든 강경 대응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거론된다. 2022년 히잡 시위 당시 이란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500명 이상이 숨졌고 2만2000명 이상이 구금당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