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화폐가치 44분의 1로 뚝…이란, 분노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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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29일 이란 테헤란 시내 고가도로 위에서 시민과 상인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란에선 화폐가치 급락 등으로 인한 경제난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EPA=연합뉴스]

“레자 샤, 편히 잠드소서.”

지난해 12월 30일(현지시간) 이란 테헤란 거리에 금기어가 울려퍼졌다. 1925년 샤(왕)에 오르고, 35년 국호를 현재의 이란으로 정한 팔라비 왕조의 개창자 레자 팔라비(레자 샤)다. 79년 이슬람 혁명은 그의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를 폐위하고 이란에 현재의 신정(神政) 공화국 체제를 세웠다. 아야톨라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를 비롯한 현 지도부엔 ‘타도의 대상’인 레자 샤를 시민들이 수도 한복판에서 연호한 것이다.

경제난에 지친 이란 시민들의 항의 시위가 불 붙듯 번지고 있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28일부터 시작된 시위는 사흘째인 이날 테헤란을 넘어 이스파한, 시라즈, 마슈하드 등 전국으로 번지고 있다. CNN은 “2022년 9월 히잡을 잘못 썼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돼 의문사한 마흐사 아미니 사건 이후 최대 규모 시위”라고 전했다.

시위대의 비판 대상은 89년부터 권좌를 지키고 있는 하메네이로 향하고 있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수위 높은 반정부 구호가 나오며 강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테헤란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이 ‘독재자에게 죽음을’ 등의 구호를 외쳤다”고 전했다.

소셜미디어에선 시위 도중 한 참가자가 테헤란 시내 도로에 앉아 오토바이를 탄 경찰과 대치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도 퍼져나갔다. 일각에선 이를 89년 중국 천안문 시위 당시 맨몸으로 진압군 탱크에 맞선 ‘탱크맨’에 빗대고 있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시위의 원인은 통화 가치 폭락으로 인한 생계난이다. 이란 화폐인 리알화의 달러당 환율은 이날 145만 리알까지 떨어졌다. 2015년 핵 합의(JCPOA) 타결 무렵 달러당 3만2000리알 안팎이던 때와 비교하면 10년 만에 44분의 1로 쪼그라든 셈이다.

리알화 폭락은 장바구니 물가를 강타했다. 이란 시위대는 파이낸셜타임스에 “우유도 비싸서 못 산다”며 “치즈값은 몇 주 만에 600만에서 800만 리알로 뛰어 구매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현지 매체 이란뉴스업데이트에 따르면 지난해 초 34만 리알이던 전지우유는 같은 해 12월 52만 리알까지 뛰었다. 이 기간 30개들이 포장 계란도 175만 리알에서 245만 리알로 올랐다. “리알로 받은 돈이 장을 보는 순간 재처럼 사라진다”는 하소연도 나왔다. 일부 상점은 우유값 등을 달러로 매기고 있다고 한다.

이란 경제가 무너진 배경으론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JCPOA를 탈퇴한 후 이어진 제재가 꼽힌다. 원유 수출이 여의치 않자 외화 유입에도 차질을 빚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해 9월 영국·프랑스·독일 주도로 유엔 제재가 복원됐다. 외화가 말라 흔들린 환율이 급등했다.

불안한 대외 관계도 큰 짐이다. 지난해 6월 이스라엘과 벌인 ‘12일 전쟁’과 미국의 핵시설 공습은 가뜩이나 부족한 해외 교역을 더 줄였다. 시위대도 외교 정책을 직격 중이다. 반체제 성향 매체 이란인터내셔널은 테헤란 샤리프 공대 등에서 “가자지구도, 레바논도 아니다. 내 목숨은 이란을 위해”라는 구호가 나왔다고 보도했다. ‘저항의 축’이라 불리는 하마스·헤즈볼라 등 역내 반(反)이스라엘 무장 세력을 지원하기보다 국민 생계를 우선하라는 요구다.

마수드 페제시키안 대통령은 “국민 구매력 유지 조치를 계획 중”이라고 밝혔지만, 특단의 방안이 아니라면 여론을 잠재우기 어려울 거란 평가가 나온다.

이란 정부는 대규모 시위를 막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지켜오던 히잡 단속을 사실상 허용하는 수준으로 완화하는 등 민심을 달래 왔지만 악화한 경제 앞에선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메네이는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 다만 보수 진영과 국영 매체에선 “시위는 시오니스트(유대인 민족주의자) 세력의 선동”으로 비판하고 있다. 일각에선 당국이 언제든 강경 대응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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