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시진핑 칼바람 예외는 없다…軍 2인자와 잘라낸 '2대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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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샤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오른쪽)이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악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24일 중국의 군 통수권자인 시진핑(習近平·73) 국가주석의 권위를 훼손한 혐의로 장유샤(張又俠·76)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이 낙마하면서 2대에 걸친 두 가문의 인연이 주목받고 있다.
장유샤의 부친 장쭝쉰(張宗遜, 1908~1998)은 중화인민공화국 개국 상장(대장) 57명 중 한 명이다. 시 주석의 부친 시중쉰(習仲勳, 1913~2002)과는 1947년 산간닝(陝甘寧) 야전집단군 사령관과 정치위원으로 6개 여단을 이끌며 국민당군과 싸운 전우였다.

장유샤 군사위 부주석의 형 장신샤(張新俠·왼쪽)가 부친인 장쭝쉰 개국상장의 사진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X 캡처
산시(陝西)성 웨이난(渭南) 출신인 장쭝쉰은 광저우 황푸군관학교 출신으로 1927년 마오쩌둥(毛澤東)이 징강산(井岡山) 일대에서 유격전을 시작할 때부터 경호를 맡은 측근이었다. 다만 상관이었던 펑더화이(彭德懷)·뤄루칭(羅瑞卿) 숙청 후 한직으로 밀렸고, 문화대혁명 이 끝난 후엔 문혁 당시 마오쩌둥 부부에게 충성을 서약했다는 이유로 불운의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문혁 당시 주자파(자본주의 추종세력)로 몰려 박해를 받았던 시중쉰과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홍이대(紅二代, 혁명 원로의 자녀) 출신 시 주석과 장 부주석 역시 어릴 때부터 친분을 쌓은 사이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12년 18차 당 대회에서 시 주석이 당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주석에 취임하자 군부 홍이대의 좌장 격인 장유샤도 승진을 거듭하며 시 주석의 군권 장악을 도왔다. 우선 선양군구 사령관에서 총장비부장으로 영전하며 중앙군사위원회에 진입했다. 2017년 19차 당 대회에서는 쉬치량(許其亮)에 이어 제2부주석으로 군 3인자로 올라섰다. 2022년 20차 당 대회에서는 연령 제한을 깨고 군사위 부주석에 유임하며 제1부주석으로 군 2인자가 됐다.

1949년 2월 제1야전군 사령관 펑더화이(오른쪽)와 장쭝쉰(왼쪽) 부사령관. 위키피디아
장유샤는 베트남 전쟁 영웅이다. 1979년 문혁 청산에 연루된 부친의 영향을 받아 퇴역을 준비하던 장은 베트남 전쟁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최전선 참전을 신청했다. 전쟁 초기 사령부는 허커우(河口)를 적시에 점령해 후속 부대의 진격로를 확보할 것을 명령했다. 이미 산기슭에 진지를 구축한 베트남군은 난공불락이었다. 과거 류보청(劉伯承) 원수와 부친이 “산이 있으면 능선이 있다”는 말을 떠올린 장유샤는 대대 병력을 지휘해 능선으로 우회해 적의 배후를 기습했다.
당시 세운 전공으로 장은 연대장으로 승진했다. 84년에는 119연대장으로 라오산(老山)전투를 지휘해 보병 포병 합동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후 40사단 부사단장을 거쳐 사단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지금의 서부 전구인 청두(成都)군구 산하 13집단군 사령관, 베이징군구 부사령관을 거쳐 2007년 중장으로 승진하며 선양군구 사령관에 임명됐다.
선양군구 사령관 당시에는 장교의 주택난을 해결하며 부하들의 명망을 얻었다. 랴오닝·지린·헤이룽장 3개 성 정부와 협력해 군인의 주택난을 해결하는 이른바 ‘동북모델’을 창안했다. 당 이론지 『구시(求是)』를 비롯해 군사 학술지에 여러 편의 논문을 게재하는 등 군 이론 측면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장유샤는 지난해 11월 12일자 인민일보에 “고질량의 국방과 군대 현대화를 추진하자”는 기고문을 싣고 겉으로는 청렴과 당성을 강조하지만, 속으로는 사익을 챙기는 “양면인(兩面人) 방지”를 주장했다. 불과 두 달 뒤 그는 군 조직으로부터 “군사위 주석 책임제를 심각하게 유린·파괴했다”는 혐의를 받고 불명예 낙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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