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내용은 인터넷에 다 있다, 책 만들기 수천년 흔적 자체가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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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의 은밀한 매력’을 펴낸 이재정 전 학예연구관을 지난 12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났다. 김성룡 기자

연간 650만 관람객이 드나드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상대적으로 인기 없는 유물이 고서(古書)다. 한문과 담쌓은 세대에겐 ‘검은 것은 글씨, 흰 것은 종이’에 불과하다. 이재정 박사(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는 그런 인식이 늘 안타까웠다. “한자를 못 읽으니 관심 없다지만, 어차피 책 내용은 인터넷에 다 있잖아요. 박물관에서 봐야 할 것은 책의 물성(物性), 말하자면 수천년에 걸쳐 책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선인들의 숨결을 느끼는 일 아닐까요. 도자기나 그림만 국보·보물인 건 아닌데….”

목간부터 수천년간 이어진 책의 역사 #'고서의 은밀한 매력' 펴낸 이재정 박사

2023년 박물관 정년 퇴임 후 조선 활자 연구를 담은 『활자본색』을 펴냈던 그가 3년 만에 『고서의 은밀한 매력』(푸른역사)이라는 신간으로 돌아왔다. 『화엄경』 『월인천강지곡』 『조선왕조실록』 등 15종을 사례로 들어 ‘옛 책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읽혔나’를 들여다봤다. 박물관에서 청춘을 바친 연구자답게 그의 관심은 텍스트(내용)보다 유물로서의 책이다. “활자를 연구하다보니 그 활자로 찍은 책을 분석해야 했죠. 그러다 보니 처음 책은 어떻게 만들어졌나까지 거슬러 올라갔고 책이 진화해 온 모습이 놀랍고 신비로워 책까지 쓰게 됐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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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마리 형태의 초조본 대보적경 권59(국보).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기증실에 전시돼 있다. 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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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조 때 간행된 수능엄경언해 권6.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기증실에 전시돼 있다. 김성룡 기자

그런 시선으로 상설전시관 3층 기증실에 전시된 『초조본 대보적경 권59』(고려 11세기)를 보면 여간 새롭지 않다. 『성문종합영어』를 쓴 송성문(1931~2011) 선생이 2003년 기증한 이 국보 경전은 여러 장의 한지를 이어 붙인 두루마리 형태다. 같은 진열장엔 조선 세조 때 간행한 『수능엄경언해 권6』(송성문 기증)도 있는데, 약 400년 뒤 나온 이 경전은 오늘날의 책에 가까운 형태다. 다만 당시 종이 질의 한계로 양면이 아닌 한면씩 인쇄하고 가운데를 반으로 접어 착착 쌓은 뒤 이를 묶었다. 실로 묶었다고 해서 선장본(線裝本)이라 부르는 이 방식은 오늘날 남은 대부분의 고서에서 볼 수 있다.

“두루마리 형태는 평소엔 둘둘 말아 보관하긴 좋았는데, 중간 대목 읽으려면 감았다 폈다 하면서 손상도 많았겠죠. 그래서 이걸 병풍처럼 차곡차곡 접는 절첩본(折帖本)이 나오고요. 이후에 종이를 착착 쌓아서 만드는 선장본에 와서야 비로소 우리가 아는 책 형태가 되죠. 특히 1438년(세종 20)에 펴낸 『자치통감강목사정전훈의』는 오늘날과 같은 서문도 있고, 범례(일러두기)와 목차도 갖췄어요. 활자도 크고 작은 변화를 줘서 본문과 주석을 구분하고요. 이렇게 보관성·휴대성·가독성을 높인 책의 만듦새가 불과 6~7세기 전 정착됐답니다. 인류 역사에선 두루마리 책이 훨씬 길었어요.”

책(冊)이라는 한자어가 유래한 목간(글씨를 쓴 나뭇조각)으로부터 돌, 금속 등의 재료, 권자본(卷子本·두루마리), 절첩본, 선장본 등 제본 변화까지 저자를 따라 책의 역사를 훑다보면 가슴 벅찬 순간이 온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 처음으로 불경을 한글로 번역한 책을 펴내는 대목이다. 온통 한문 유물뿐이다가 『월인천강지곡』(국보)이 소개될 때, 굵은 돋움체로 된 한글음에 부속물처럼 작은 글씨로 한자가 병기된 모습이 새삼스럽다. 더구나 당대에 귀했던 금속활자로 한글 글자를 찍었단 것 자체가 당대 문화의 자존감을 일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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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의 은밀한 매력』(이재정 지음)에 소개된 『월인천강지곡』 100, 101수 부분. 세종이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노랫말 형식의 운문으로 지은 것으로 새로 창제한 한글을 표기, 활용, 보급하기 위한 노력이 담겼다. 사진 푸른역사

“좀 과장하면 당시 금속활자란 게 오늘날 반도체 비슷한 기술력이 필요한 건데, 실제로도 세종·세조·성종·정조 등 통치가 안정되고 인력·기술력·경제력이 뒷받침된 시대에 집중 생산됐어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 같은 경우도 전란이 없고 왕권이 강했던 시기엔 금속활자로 찍었는데, 목활자에 비할 바 없이 아름다워요. 게다가 실물로 남은 실록에는 당시 사관이 오탈자를 교정한 흔적도 또렷해요. 텍스트만 볼 땐 알 수 없는 노력들이죠.”

지금은 책이 흔하다 못해 ‘애물단지’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돌아보는 고서의 시대는 종이도, 정보도 귀했고 그 때문에 한권 한권이 남달랐다. 직접 필사하거나, 찢어진 부분에 종이를 덧대 보수하고, 비단으로 표지를 하거나 소장자를 인증하는 인장(印匠)을 남기는 등 개별 책을 ‘보물’처럼 다뤘다. 박물관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들도 그런 ‘사람의 흔적’이라고 이 박사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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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의 은밀한 매력』(이재정 지음)에 소개된 인천 계양산성 출토 '논어' 목간. 종이책이 보편화되기 전엔 이같은 나뭇조각에 지식과 정보를 담았다. 사진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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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의 은밀한 매력』(이재정 지음)에 소개된 백제 왕궁리 오층석탑 출토 금강경판과 내함 및 외함. 1965년 발견됐으며 금강경판은 각장 길이 14.8㎝, 넘지 17.4㎝의 경팜 19장이 접힌 형태로 금속 띠에 묶인채 담겨 있었다. 사진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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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의 은밀한 매력』(이재정 지음)에 소개된 『묘법연화경』 권5 부분. 감색 종이에 은먹으로 쓴 묘법연화경으로 동일한 크기의 종이를 가로로 일어 붙인 후 일정한 폭으로 접어 병풍처럼 펼치고 접을 수 있게 한 절첩본이다. 사진 푸른역사

“자동차 시대가 됐어도 마차 몰던 시대의 관습이 운전석에 남았듯이, 수천년간 책이 변화하면서도 그 전 시대의 흔적과 숨결이 이어져요. 예컨대 조선 왕조에서 왕비나 왕세자 책봉 때 하사하는 어책(御冊)은 더 이상 쓰지 않는 목간 비슷한 모양인데, 일종의 예물이자 징표로서 의미였거든요. AI(인공지능) 시대에 책이 무슨 의미인지 회의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래서 오히려 고서의 작품성·개별성 같은 걸 조명해보고 싶었어요. 21세기에 박물관에 오는 이유가 실용 때문은 아니듯, 디지털 시대에도 책의 가치는 이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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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의 은밀한 매력’ 펴낸 이재정 전 학예연구관이 12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2026.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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