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뉴욕서 해고된 50세 가장이 고향 마을서 우편 배달하며 찾은 것[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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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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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타링 그랜트 지음
정혜윤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지구상에서 가장 각광받는 광고회사에서 일했고, 최고 브랜드들의 전략가였으며, ‘포춘’ 선정 50대 기업에서 부사장으로 일하던” 저자는 출근길에 해고를 통보받는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기업들이 “해치를 닫는” 비상경영에 돌입하기 시작하면서다. 한 아내의 남편이자 두 10대 딸의 아버지, 무엇보다 4개월 전 암 진단을 받은 50세의 가장으로서 그는 “늘 떠나는 게 꿈이었던” 고향으로 돌아간다. 버지니아공대가 있어 ‘애팔래치아의 케임브리지’라 불리는 버지니아주 블랙스버그다.

의료보험 자격이 절실했던 저자는 거기서 파트타임 우편배달부 자리를 얻는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잘나가던 뉴욕의 경영·마케팅 전문가가 시골에서 우편물을 배달하며 벌이는 좌충우돌 분투기다. 거기까지라면 너무 뻔해 이 글이 민망할 터지만, 저자는 역경 탈출 이상의 과실을 얻는다. 실직에 대한 자책, 정체성 상실의 불안감, 세상을 향한 분노 등 우편물보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사무실 안에서 잊어버렸던 자아와 삶의 본질적 목표를 되찾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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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가데나에 위치한 미국 우정청(USPS) 가데나 우체국에 고객들이 발송을 위해 맡긴 소포 상자들이 쌓여 있는 모습. [AFP=연합뉴스]

저자가 시급 18달러 50센트의 우편배달 보조원이 되기로 한 것은 ‘주 1회 근무’라는 조건 때문이었다. 나머지 6일은 자신에게 걸맞은 자리를 알아보겠다는 계산이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솔길을 걷고 인심 좋은 사람들에게서 커피를 얻어 마시며 잡담을 즐기는 영화 속 우체부 모습을 기대한 것도 사실이었다. 존 덴버가 ‘테이크 미 홈 컨트리 로드’를 부르면서 그리워하는 블루리지 산맥과 셰넌도어 강이 있는 바로 그(정확하게는 그 옆) 동네 아닌가.

처음에 도심 지역인 10구역에서 일할 때는 문제 없었다. 미로 같은 기업연구단지가 속해 다른 사람에게는 어려울 수 있어도 그곳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저자에게는 “과거의 자신에게 배달하는 일”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벼랑으로 내몬 삶이 그리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우편배달계의 신동’을 자처하던 저자는 길이가 100km가 넘는 지역에 배송지가 724곳인 3구역에서 그야말로 임자를 만난다. 풍경은 시골 배달부가 되기로 했던 때 상상했던 그대로인데 실체는 괴물이었다.

첫날부터 산길에서 우편 트럭이 미끄러지는 사고로 혼이 빠지고, 말벌집으로 변해버린 우체통에 손을 집어넣기도 하며, 50kg이 넘는 냉장고를 등에 지고 개울을 건너야 할 때도 있었다. 가구를 조립해놓고 가라는 진상 고객을 피하지 못했고, 해가 짧은 겨울 저녁 외딴집에 들어서면서 총 맞는 걱정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버지니아공대 교수였던 저자의 아버지가 2007년 조승희의 총기난사 사건 때 총상을 입은 뒤 생긴 트라우마이기도 했다. 그래선지 이 책에는 유독 총기 얘기가 많이 나온다.

배달 과정에서 갖가지 실수를 해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잘릴 일 없는 미 우정국에서 최초로 잘린 사람이 되는 ‘공포’를 겪기도 한다. 주 1회 근무는 허울뿐, 인력 부족으로 주 7일을 일한 적도 드물지 않았다. 그럼에도 돈은 늘 부족했고, 그로 인한 불안이 분노로 치달을 때 저자는 아버지의 말을 되새겼다. “세상은 너에게 빚진 게 없다.”

쓸데없는 자기 연민을 버리고 계획을 세워 스스로 운을 개척해나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엉뚱하지만 헌신적으로 일하면서 저자는 서서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것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우체통에 편지를 넣을 수 있도록 오른쪽 조수석에 앉아 운전하는 법을 터득한 것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 아니 배달부가 산골 오지 사람들에게 희망을 배달하는, 그들의 집을 찾아가는 유일한 연방 공무원이라는 자부심이었다. 그것은 “나보다 훨씬 큰 존재”였다. 저자가 배달부로 일한 것은 고작 1년이고 이제 다시 본업을 찾아갔지만 그때의 경험은 삶과 노동의 참된 가치를 일깨워줬다. 어떠한 삶을 사느냐를 가르는 경계는 화이트와 블루 칼라의 구분이 아니라 노동과 봉사의 구분에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의 경험처럼 개인에 앞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있는 동료 배달부에 대한 헌사이자, 막막한 미래 앞에서 망연자실한 사람들에게 길을 비추는 안내서이기도 하다. 유려한 필체와 유머 감각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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