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마거릿 때문에 깨달은 '사랑'...그 단어가 중국인에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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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her Lim / 장인어른이 될 뻔했던 분

이주자 중에는 흥미로운 사연을 품은 사람들이 많다. 내 사연도 특이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마거릿의 사연은 훨씬 더 흥미로웠다. 그 어머니가 인생의 험한 고비를 헤쳐나온 능력에 경의를 느꼈는데, 그 아버지에 관해 알게 된 것은 마거릿이 그분 만나러 타이완에 다녀온 후였다. 그 이야기는 내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집안의 사연을 흥미롭게 부각해 내 마음에 길이 남게 했을 뿐 아니라 아직도 문제로 남아있는 중국과 타이완의 복잡한 관계의 한 단면을 보여준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타이완-아모이 사업계에서 손꼽히는 집안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아모이의 구랑위(鼓浪嶼)에 있는 영-중 학교를 다녔다. 구랑위는 아름다운 서양식 건물이 가득한 섬이다.

내가 봐도 그분은 지능이 뛰어나고 훌륭한 성취를 바라볼 능력을 가진 분이었다. 어머니께 듣기로, 옌칭대학에 다닐 때 미국에서 박사공부를 할 록펠러 장학금을 받았는데,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공부가 ‘쓸모없고 후진적’인 일이라는 별난 생각을 했다고.

‘역사는 헛소리’란 말로 유명한 헨리 포드 같은 사업가를 그분은 선망했다. 그런데 내가 본 사람 중에 사업에 제일 안 맞는 사람이면서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돈벌이와 성공을 향한 열정이 없었다. 집안 분위기에 연유하는 문제라는 것이 기묘한 일이다.

할아버지는 세 분 부인에게 아들 하나씩 얻었다. 아버지는 셋째 부인 소생이었다. 할머니가 아들 버릇을 잘못 들였다. 책임감과 고된 노력을 통해야만 인생의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잘못되는 일이 있으면 남들이 속인 것을 탓하고 자신이 속은 잘못은 생각할 줄 몰랐다. 공부를 잘해서 11살쯤 아모이의 영-중 학교에 들어가면서 집안의 사업 분위기로부터 떨어져 지냈다.

나서서 싸우고 노력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일찍 익힌 어머니는 이 점에서 아버지와 반대였다. 현실적이고 능력 있는 여자와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본 일 없이 성질만 급한 몽상가의 결혼은 성공으로 끝나기 힘들 것이다. 결혼 초부터 삐걱거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서로 안 맞는 짝이 또 있었을까!”

이 이야기는 마거릿이 헤어진 지 8년 되는 아버지를 만나러 1953년에 타이완으로 가기 전에 들은 것이다. 그때까지는 부득이한 이산가족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다녀온 후 그가 해준 이야기는 70년간 내 마음을 사로잡아 온 더 큰 이야기의 도입부가 되었다.

“나는 아버지와 이따금씩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어느 날 타이페이에 자기를 보러 오라며 홍콩-타이페이 왕복 운임을 내겠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당시 타이완은 중국과 전쟁 상태였고 국민당이 그곳을 점령한 지 겨우 8년 되었을 때였다. 타이완은 50년간 일본 식민지였다. 타이완 사람들이 중국에 합쳐지기를 싫어한 것이 아니라, 국민당이 일본보다 잘한 것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지역민을 식민지 원주민처럼 취급했다. 약 1백만 대륙인이 침략자처럼 들이닥쳐 좋은 자리를 다 차지했다. 지역민이 대륙을 싫어하게 된 것은 국민당의 유산이고 이제 대륙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마침내 비자가 나와 아버지를 만나러 타이베이 가는 비행기를 탔다. 아버지는 새로 결혼해서 다섯 살 된 딸이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내가 알면 오지 않을까봐 미리 말하지 않았다는 말씀이 맞는 것 같다. 그때는 어려서 지금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으니까!

도착 직후 아버지를 따라 출입국사무소에 가서 출국비자를 신청할 때 문제에 부닥쳤다. 내가 타이완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중국인인 내가 왜 출국하려 하는지 질문이 있었다. 이 정부가 나를 자기네 시민으로 본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1909년에 제정된 법률로 어느 곳에서 태어났든 중국인 아버지의 자식은 중국인이 되게 되어 있었다. 내가 왜 중국을 떠나려 하느냐 하는 질문에 나는 공포에 질렸다.

내가 아들이라면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는 어머니 말씀을 싱가포르에 돌아와서 들었다. 남자라면 병역 때문에 못 풀려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래도 비자를 받아 무사히 돌아왔다. 타이완 당국이 이 정책을 후에 버린 것은 그 때문에 타이완에 찾아오지 않는 중국인이 많다는 문제를 인식한 결과일 것이다. 방문 화교가 중공을 반대하고 자기네를 지지해야 한다던 태도를 타이완 정부가 거둘 때까지 30년 이상 겅우와 나는 타이완 방문을 거부했다.

이 일로 혼이 나서 다시는 타이완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아직도 쉴 새 없이 어머니를 탓하는 아버지를 대하기도 불편했다. 내가 어머니 편을 들며 화를 냈기 때문에 아버지도 불편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불쌍하기는 했다. 그분의 인생은 물질적인 기준만이 아니라 보람을 느낄 만한 성취가 없다는 의미에서 실패였다.”

수십 년이 지나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시대가 지난 후 우리는 거리낌 없이 타이완을 여행하게 되었다. 마거릿은 아버지 가족들과 연락이 끊겨 있었으나 우리는 림 씨 집안 역사가 궁금했다. 중요한 고리는 마거릿이 1953년 만난 백부 린판왕(林番王)이었는데, 킬룽에 사진관을 갖고 있었다. 림 씨 조상은 19세기 초 샤먼에서 킬룽으로 옮겼다. 마거릿의 할아버지는 크게 성공한 사업가로 큰아들 판왕을 푸저우 최고의 학교로 보내고 마거릿의 아버지를 샤먼의 영-중 학교로 보내 공부시켰다. 림 씨 자손 중에는 일본 가서 공부한 사람도 많았다.

린판왕이 1960년 킬룽 시장에 무소속으로 당선된 것을 알게 되었다. 1964년에 재선되고 1년 후 현직으로 죽자 치앙카이셱(장제스) 공원에 매장되었다. 2010년 묘소를 찾아가 보니 잘 관리되어 있었고, 그 공원에 유일한 묘소였다. 지역의 반-국민당 정서가 묘소의 보전에 도움이 되었는데, 2014년의 치열한 선거전 중 비석 파손은 국민당 지지자들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2018년에 다시 갔을 때는 수리가 잘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에 새로 뽑힌 녹색당 소속 시장이 이 묘소를 깔끔히 단장하고 사진을 웹에 올렸다. 1945년 이후 타이완의 복잡한 정치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의 하나가 되었다.

Learn to Share / 함께하는 연습

내 영문학 공부 자세가 흐트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마거릿은 알아보았다. 시와 소설 읽기는 계속하고 프랑스와 러시아 작가들에 관심도 키우고 있었으나 말라야의 장래와 관련된 사회과학 문헌에 끌리고 있었다. 남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작가들을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제국 지배에 대한 백인들의 생각을 이해하게 되었다. 대영제국이 기울기 시작한 후에야 그 제국의 문학작품 일부를 이해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그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글을 더 읽을수록 여러 식민지에서 영국인 소행의 공통 요소를 더 많이 알아보게 되었다.

“사랑”이란 것을 마주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마거릿 때문이었다. 영어 단어 “love”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중국어에서 “아이(愛)”는 어머니의 아이 사랑을 표준으로 하는 유가적 관념이다. 부모님은 서로 아끼는 마음을 그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중국인학교 친구들은 “애국”에 그 말을 많이 썼다. 일본 침략에 대비해 중국의 방위성금을 걷는 집회에서는 “애국 화교”란 말이 늘 나왔다. 기꺼이 호응하는 사람이 많았다.

내가 현대 문학작품을 많이 읽었다면 5-4세대 이후 중국인의 삶이 사랑의 관념으로 얼마나 큰 변화를 겪었는지 알았을 것이다. 1년 반 중국에 있는 동안 “아이(愛)‘란 말의 기세가 가정에서나 정치에서나 다소 꺾여 있는 것을 느꼈다. 노래에 그 말이 계속 쓰이기는 하지만 강렬한 느낌이 없었다. 20세기 초에 사람들을 휘어잡던 정열이 없었다. 낭만주의 작품에 나오는 영어 단어 ”love“의 번역어로 ”아이(愛)“가 얼마나 아쉬운 것인지 생각했다.

사랑이 도처에 넘쳐나고 그 말이 마구 소비되는 소설과 영화들을 보았다. 모든 서양 창작물에 ”사랑“이 넘치는 것 같았다. 그것이 내가 문학을 ”사랑“한 이유였을까? 입학 무렵 베다 림에게 내가 문학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깊은 뜻 없이 쓴 말이고 시와 소설에 대한 기호의 표현일 뿐이었다. 그 말에 심각한 측면이 있음을 차츰 알게 되었다. 3학년이 되어 마거릿을 만난 후에야 그 말이 하나의 초점을 갖게 되고 이후로는 그 말 쓰기가 조심스러워졌다.

그 변화가 마거릿과의 만남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내 인생의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새로운 경험이 그 만남으로 시작된 사실을 훨씬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1951년 초에 만나 1955년 말 결혼할 때까지 그 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 삶에서 뚜렷한 모습을 키워왔다. 이제 내가 사랑한 사실을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고 사랑받아 온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 말이 아직도 때때로 마음속에 격동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내가 역사학도의 길에 들어설 때의 일들은 나중에 이야기하겠다. 여기서는 그 결정이 내가 마거릿을 더 잘 아는 데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만 밝혀둔다.

마거릿의 특이한 배경을 알게 되면서 새로운 눈으로 그를 보게 되었다. 우리가 만나게 된 사실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내가 졸업 후 취직 대신 학업을 계속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데 마거릿은 무한한 격려를 해주었다. 마거릿의 어머니가 내 부모님을 만난 후 매사가 순풍일로였다. 내가 장학금을 얻어 런던에서 박사과정을 밟게 된다면 약혼하기로 했다.

이 방침이 마거릿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었는지, 그가 유럽행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제국의 짐을 벗어나려 애쓰고 있는 전후 영국을 식민지의 우리 세대가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우리가 추구해 왔고 다시 잃지 않으려 노력하게 될 자유의 맛을 그곳의 생활에서 어떻게 얻게 되는지, 마거릿의 기록에서 살펴본다.

“우리는 왜 영국에 갔는가? 미국 학위가 권위가 없다는 이유도 있고, 영국이 ‘본국’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영국식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들의 독특한 태도다. 중국 내 중국인이 미국 쪽을 더 바라본 것은 미국 선교사들이 중국에 세운 학교들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미국이 메카였다. 그러나 말라야와 싱가포르 사람들에게는 영국이 공부하러 갈 곳이었다.

그 시절에는 영국으로 이주하는 식민지 사람이 영국에 문제가 될 만큼 많지 않았다. 영국 신민은 누구라도 영국에 가서 살 수 있었다. 우리는 말라야의 각 지방보다 영국의 각 지방을 더 잘 알게 해주는 학교 교육을 받았다. 영국식 학교가 특히 심했다. 이런 교육의 효과가 너무 좋아서, 독립 논의가 나왔을 때 지배를 계속해 달라고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탄원서를 보낸 페낭의 사회지도자들도 있었다.

그러니 우리가 공부의 다음 단계를 생각할 때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나 런던대학을 떠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북쪽의 맨체스터나 에든버러를 향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위 세 개 대학으로 가는 사람이 제일 많았다. 입학이 힘든 학교들이었지만 말라야대학 졸업장은 인정이 되고 졸업생들의 실적이 좋았기 때문에 우대를 받았다.”

내 일생을 통한 난제 하나가 말라야를 그냥 내 집으로 삼을 것이냐, 아니면 중국과 중국사 연구의 길을 택해 그 일을 위한 조건이 좋은 곳을 찾아갈 것이냐, 하는 선택이었다. 어쩌면 열대지역의 토착 영국인으로서 글쓰기와 자기 생각과 경험의 기록에 지역 언어를 활용하는 길 사이의 선택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새 목소리를 찾는 쪽으로 끌림이 더 강했다.

마거릿도 이것을 기묘하고 재미있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일생을 통해 나를 대하는 하나의 현실주의적 틀이 있었다. 더 잘하도록 몰고 가는 당근과 채찍이었다! 이제 돌아보면, 실체를 파악하기 힘든 그 무엇, 사랑이라고 불리는 그것을 키우기 위한 최고의 터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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