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런던에서의 결혼, 케임브리지 첫 집, 그리고 첫 아기 [왕겅우 회고록-청년기(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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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부. 내 가정 만들기

Reunion and Marriage / 재회와 결혼

영국문화원 장학금은 2년 기간이었다. 런던까지 여비와 생활비를 겨우 댈 금액이었다. 배우자를 위한 배려는 없었다. 내가 학문의 사다리 훈련을 받는 여러 해 동안 떨어져 지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마거릿은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일해서 자기 여비를 버는 것이 나와 합칠 수 있는 길임을 알았다. 내 책임감과 능력이 부족해서 그를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 빠트린 것이 돌이켜 생각해도 미안한 일이다. 그의 결단력 덕분에 겨우 1년 남짓 지난 후 다시 합치게 되었으니 그 이야기도 그에게 맡기겠다.

“1955년 9월에 겅우와 재회했다. 친구 아이비 소와 함께 여행했다. 나폴리까지 가는 이탈리아 배를 탔다. 나폴리에서는 파리를 거쳐 런던까지 가는 기차를 탔다. 비토리아역에 도착하니 겅우가 마중나와 있었다. 1년 동안 쌓인 그리움 때문에 너무나 반가웠다. 겅우는 소아스 곁의 기숙사 코노트 홀에서 살고 있었다. 내가 케임브리지의 호머튼 칼리지에 갈 때까지 두 주일 런던에 있는 동안 지낼 여자 기숙사를 자기 기숙사 가까운 곳에 예약해 놓았다.

도착 후 런던에서의 시간을 최대한 즐겼다. 겅우가 지내던 코노트 홀은 아주 편리한 곳이지만 음식은 끔찍했다. 영국의 시설 음식을 흉보는 온갖 이야기가 있는데, 그 모든 이야기가 다 맞는 곳이었다. 덕분에 겅우가 부엌일을 익히게 되었다.  

마침내 런던에서 지낼 시간이 다 되자 겅우가 아이비와 나를 케임브리지로 안내해 주었다. 당시 호머튼 칼리지는 정식 칼리지가 아닌 교원 양성기관이었다. 전문학교 졸업증을 위한 2년짜리 학위 코스가 있었다.  

호머튼에서 칼리지 생활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그 시절 학생 통제는 지금 상상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열 시가 귀사 시간이었고 따로 허가받아야 열한 시까지였다! 식사는 늘 소시지와 으깬 감자, 너무 익힌 채소에 묵직한 푸딩이 디저트였다. 첫 학기 동안 아시아 음식은 거의 없었다. 케임브리지에는 쓸만한 중국식당이 없었고, 런던의 중국식당은 비쌌다.  

내가 런던으로 가든, 겅우가 케임브리지로 오든, 주말마다 만났다. 런던에 다닐 데가 많기 때문에 내가 가는 일이 많았다. 마침내 계속 오락가락하기에 지쳐서 결혼해 함께 살 것을 겅우가 제안했다. 그때까지 내게는 영국에서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어머니가 맏딸 결혼식을 제대로 치를 수 있도록 싱가포르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그런데 그때 겅우 부모님이 은퇴 후 휴가로 런던에 와 계셔서 혼주 노릇을 해주실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 편지로 사정을 설명하고 허락을 청했다. 동의해 주셔서 마음이 놓였다.”

우리에겐 영국에서 결혼식을 치를 계획이 없었고, 떨어져 있는 1년 동안 그런 가능성을 얘기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일단 결정이 내려지자 일이 되게 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마거릿이라는 사실이 다시 확인되었다. 어떤 일이 필요했는지, 그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내 결혼 소식에 학교 친구들이 모두 흥분했다. 아이비에게 들러리를 부탁하고 나는 신부복으로 장삼(長衫)을 입기로 했다. 장삼은 내가 손수 지어야 했는데, 칼리지에서 재봉틀을 빌려 작업했다. 아이비도 자기 장삼을 지었다. 기성복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서 우리는 대개 재봉을 할 줄 알았다. 그리고 런던에 있는 싱가포르-말라야 사람으로 초청 명단을 작성하면서 영국 친구들도 좀 넣었다.  

나 자신의 결혼 이야기가 이렇게 흐릿한 것을 보면 나를 무척 허술한 사람으로 볼 것이다. 변명하자면, 이사를 너무 자주 다녀서 문서를 잘 챙기지 못한 것이 많다. 결혼앨범조차 만들지 못했다. 돈이 없어서 결혼식에 사진사도 부르지 못하고 피로연 가는 길에 사진관에 들러 몇 장 찍었을 뿐이다.  

런던대학 교수와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하인드 스트리트 감리교회에서의 아름다운 예식을 기억한다. 친구들과 함께한 즐거운 오찬도 기억한다. 여러 해 후 1975년에 겅우와 함께 세 아이를 데리고 그 교회를 지나다가 들어가 목사님과 만났더니 교회 기록에서 우리 결혼식의 날짜와 세부사항을 찾아주었다.”

Cambridge and London / 케임브리지와 런던

우리 부부의 첫 집은 케임브리지에 있었다. 7개월만 지냈으나 신혼을 위한 아름다운 장소였다. 마침내 기차역도 바쁜 작별도 없이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마거릿은 호머튼이나 체스터튼 남학교로 자전거를 타고 갔고 나는 대학도서관으로 걸어갔다. 런던 여러 곳에 서고가 갈라져 있던 소아스 도서관과 달리 (책 대출에 보통 사흘씩 걸렸다.) 원하는 모든 것이 한 곳에 있었다.

그때 마거릿과 나는 조지프 니덤을 존경하고 있었다. 니덤은 〈중국의 과학과 문명〉 첫 두 권을 막 내고, 중국의 과학 활동 전체를 개관하는 거대한 작업을 예고하고 있었다. 니덤 같은 상상력과 과학 지식을 방대한 중국 문헌에 적용할 때 어떤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교내의 몇 차례 사교행사에서 만난 일이 있는 그를 그의 칼리지로 찾아갔다. 내가 하는 일을 묻기에 남해 교역을 연구한 일을 말했더니 중국 본초학에 나오는 열대식물을 아주 잘 아는 것이었다.

결혼 초의 몇 달 생활에 대해서는 마거릿의 기억이 생생하다.

“결혼식 올리러 런던으로 가기 전에 살 집을 잡아놓았다. 2층 테라스하우스의 1층이었다. 우리 건물들 건너편에는 초가지붕의 예쁜 집들이 줄지어 있었다. 집주인은 방 두 칸과 부엌이 있던 1층을 아파트 형태로 개조했다. 1주일에 4파운드, 그런 집의 표준 집세였다.

연수받는 교사들은 일정 기간 수업 실습을 해야 한다. 40명 학생을 한꺼번에 마주하는 것은 젊은 교사에게 충격적 경험이다. 아이들의 얼굴과 그 얼굴 뒤의 성격을 알아야 하고 이름을 외워야 하고 45분간 뭔가 지식을 전해줘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 대부분이 셰익스피어를 읽을 생각도 없고 알렉산더가 인도까지 휩쓴 사실을 알고 싶은 마음도 없다는 현실을 깨닫는다.

체스터튼 중학에 처음 갔을 때 학생들이 공부를 우습게 보는 태도에 제일 먼저 놀랐다. 빨리 학교를 떠나 직업을 가질 날만 고대하고 있었다. 학교 다니는 것을 특권으로 여기고 교육을 그토록 중시하는 아시아에서 온 나로서는 아이들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 실망스러운 경험이어서 교사 노릇을 아예 포기할 뻔했다! 아이들은 선생을 싫어하고 대부분 선생도 아이들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과정을 끝내고 런던에 갔을 때 교사 자리 찾기가 쉬웠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처음 보는 중국 여자라는 희소가치가 다행히 내 밑천이 되었다. 싱가포르나 말라야나 중국의 풍속 이야기를 해주면 솔깃해했다. 장삼을 입고 학교에 가기도 하고 중국인의 식생활 설명을 위해 밥공기와 젓가락을 가져가 보여주기도 했다. 그럭저럭 실습을 무사히 끝내고 칼리지로 돌아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런던 나가면 대개 낮시간을 부모님과 함께했고, 그 후에 연극이나 음악회 구경을 하면 늦은 기차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대영박물관 도서관에서 문헌학에 관한 최근 연구를 훑어보는 데 시간을 많이 쓰고 계셨다. 영어를 못해서 숙소를 지키는 어머니에게는 힘든 생활이었다.
런던에 갈 때는 중국의 일가 소식을 들으려 애썼다. 친가와 외가 소식은 많지 않았고, 어머니는 중화인민공화국 소식을 많이 얘기하셨는데, 마오쩌둥이 “신민주주의” 약속을 얼마나 빨리 뒤집어 버렸나 하는 것이 골자였다. 그분은 공산당이 소련 모델을 들여와 나라를 알아볼 수 없게 뒤바꿔 버리는 한 돌아가지 않겠다는 생각이 분명하셨다.

울버햄튼에 있는 말라야 사범학교에서 아버지에게 자리 제안이 있었다는 말씀도 했는데, 아버지 건강이 안 좋으셔서 여름에 말라야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곧 런던으로 옮겨올 것을 알고 계셨으나 런던에서 또 한 차례 겨울을 지낼 수는 없겠다고 하셨다. 그분들을 배웅한 후 앞서 얘기한 중국학대회 참석을 위해 우리는 파리로 갔다. 마거릿은 그 일을 이렇게 적었다.

“그해 여름 겅우와 나는 청년 중국학대회에 갔다.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올 때 파리에 들르지 않았기 때문에 내게는 첫 파리 방문이었다. 주최 측은 멋진 대회를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숙소는 다소 검소한 학생기숙사였으나 훌륭한 프랑스요리가 끼마다 나왔다. 대회 내용도 재미있고, 후에 유명한 학자가 될 청년들이 많이 참석했다.  

그런데 파리에서 메트로를 타고 다니다가 이따금 어지럼증을 느끼는 등 몸의 불편을 느끼기 시작했다. 감기 같은 것 아닐까, 프랑스 물이 안 맞는 것일까, 생각했다. 그런데 런던에 돌아와 보니 임신을 한 것이었다! 피임 노력은 하지 않았었다. 하녀를 쓸 수 있는 싱가포르-말라야에서는 무방한 일이었다. 자녀 양육 때문에 경력을 늦출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아이 안 갖는 것을 선택지로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때 영국 의료제도의 문제점 하나를 알게 되었다. 오래 기다리게 하는 문제였다. 두 시 진찰 예약을 하고 가서 세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실제로 진찰받을 수 있는 시간에 가깝게 예약해 줄 수 없냐고 묻자 이상한 사람 보듯이 놀라서 쳐다보는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그 의료제도에 불만이 없다. 특히 열흘 입원해 있다가 첫 아이 밍을 안고 나오면서 병원에 낼 돈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는.”

Birth of a Baby / 첫 아기가 오다.

우리에게는 아이 가질 계획이 없었다. 둘 다 직업이 없는 상황에서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거릿이 임신 사실을 알려주고 1957년 4월 출산 예정이라고 할 때 아버지 노릇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던 나는 겁이 났다. 마거릿은 태연하게 필요한 일은 자기가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 준비라고 마거릿이 생각한 것은 고작 책 한 권 사서 읽는 것뿐이었다. 그가 얼마나 침착한지, 얼마나 빨리 배우는지, 나는 늘 깜짝깜짝 놀랐다. 그동안 논문을 끝내려는 내 마음은 더욱더 바빠지고 있었다. 그해 8월 장학금이 끝날 때 일자리를 찾으려면 논문을 제대로 써놓아야 했다.

“우리 인생의 이 중요한 일 앞에 우리는 온갖 무지를 드러냈다. 나는 임산부를 위한 영국의 사회보장 제도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겅우 역시 출산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임신 중 건강한 상태였고 체중도 별로 늘지 않아서 아기 다루는 방법에 관한 책 한 권 읽는 외에 별로 한 일이 없었다. 몇 달 후 싱가포르로 돌아갈 참이므로 휴대용 아기침대와 좀 큼직한 영국식 유모차를 하나 샀다.

산통은 1957년 4월 9일 아침 일찍 시작되었다. 해머스미스 병원에 데려가도록 앰뷸런스를 볼렀다. 당시 관습이었다. 겅우도 따라왔으나 분만 준비 때 쫓겨나 종일 얼굴을 볼 수 없었다. 5시경 저녁 면회시간에 만날 수 있었으나 아기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새벽 세 시에 밍이 태어났다.

내 고생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환자의 권리 같은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엄격하고 뻣뻣한 간호사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남편은 면회시간 외에 병동에 들어올 수 없었고, 분만 상황을 알려주지 않는 병원 방침 때문에 겅우는 내 형편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밍은 나오자마자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 오늘날 병원은 많이 좋아져서 환자를 멍청이나 무식꾼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남편들이 아내 곁에 있도록 허락되고, 아기에게 특별 관리가 필요한 경우라도 산모를 무지와 공포 속에 내버려두지 않고 상황을 최선을 다해 알려준다.

런던에서 지낸 그 시절을 돌아볼 때, 영국 제도에서 대학원생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던 것이 새삼 놀랍다. 지도교수가 학생의 논문을 읽어준다면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자기 목표와 자기 길을 자기가 알리라는 전제가 있었다. 미국 제도는 전혀 달랐다. 대학은 연구에 도움이 될 강의를 개설하고 지도교수는 단계마다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실패로 끝나는 사람이 적었다. 아직 박사학위가 많지 않을 때였다. 학위 만능주의는 미국 발 유행병으로 여겨지고 영국의 유명 교수 중에는 학사학위 소지자가 많았다. 그러나 1960년대에 경쟁이 심해지면서 박사학위를 받으려는 대학원생이 늘어났다.

겅우가 1957년 6월에 학위논문을 제출하고 싱가포르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말라야대학 역사학과에 취직을 신청해서 전임강사로 채용이 되었다. 데니스는 우리가 돈도 다 떨어져 가는 상황에서 겅우의 학위 수여가 시급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심사 과정을 빠르게 꾸려줬다. 8월에 겅우는 구두심사를 치르고 아주 밝은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왕겅우 박사’ 앞으로 소포 하나가 왔다. 보낸 사람은 심사위원 한 분인 에드윈 펄리블랭크 교수, 케임브리지대학 중국어 교수였다. 심사의 공식 결과 통보에는 시간이 걸리는데, 결과를 서둘러 알려주는 그분 나름의 방식이었다. 잊을 수 없는 친절이며, 힘 가진 사람이 조그만 행동으로도 어려운 입장의 사람에게 쉽게 친절을 베풀고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우리 또한 우리 도움이 필요한 동료나 학생이나 누구나 도움을 베풀려고 노력해 왔다. 좋은 행동은 순환을 통해 행복을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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