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폐허된 ‘아카데미 하우스’ 살린 서점 주인 “민주화 가치 되살리는 공간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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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무권 대표가 '더숲 아카데미 하우스' 본관의 북카페에서 풍경을 살피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강원용(1917~2006) 목사 별세 이후 사실상 폐허로 방치됐던 서울 수유동 ‘아카데미 하우스’가 ‘더숲’이라는 이름을 더해 6일 새로 문을 연다. 노원문고·더숲 초소책방·더숲 아트시네마 등을 운영하며 30여년간 문화공간사업을 해 온 탁무권(69) 대표에 의해서다. 지난 2일 오후 공사 중인 ‘더숲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만난 탁 대표는 “허물어진 사회적 가치를 회복하는 공간으로 쓰이기를 바란다”며 “강 목사의 운영 철학을 새 시대에 맞게 계승해나가려 한다”고 말했다.
‘노원서점’ 탁무권 대표
‘아카데미 하우스’는 1966년 강 목사가 불암산·수락산·도봉산·북한산이 모두 보이는 탁 트인 전망의 약 2만㎡(6000평) 규모 부지 위에 조성한 공간이다. 1965년 강 목사가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를 위해 할 일은 사회 공헌’이라는 생각으로 발족한 ‘크리스천 아카데미’의 거점 장소로 쓰였다. 이곳에서 1년에 약 20회의 대화모임이 열렸으며, ‘중간집단(대중과 지식인 사이를 지칭하는 집단) 교육’도 이뤄졌다. 이들의 열망이 민주화 운동 등으로 향했기 때문에, 1979년 교육 간사 6명이 구속되는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 ‘아카데미 하우스’는 경영 부진을 겪으며 2004년 말 강 목사의 소속 교단이었던 한국기독교장로회가 매입했다. 이후 이 넓은 땅은 제대로 운영할 임차인을 구하지 못한 채 역사 속에 묻혀있었다.

1960년대 아카데미 하우스의 모습. 사진 속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대화의 집'이고, 오른쪽이 북스테이로 개편되는 '본관'이다. 중앙포토
탁 대표는 2024년 1월 한국기독교장로회로부터 ‘우리 공간을 좀 맡아달라’고 제안을 받고, 그해 9월 ‘아카데미 하우스’의 임차인이 됐다. 임차 기간은 20년이다. 그는 “역사적 현장이 방치된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 가치를 되살리는 것이 시대적 소명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성균관대 재학 시절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탁 대표는 윤이상 평화재단, 한겨레 통일문화재단 등 여러 사회단체에서 활동했다. 강북에 대형 서점 ‘노원서점’을 연 것도 “이런 공간을 바탕으로 지역을 살려내면 지역 격차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탁 대표는 ‘아카데미 하우스’ 역시 독립성과 공공성, 글로컬 개념 등을 주요한 가치로 삼아 꾸려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본관과 대화의 집이 연결되는 공간에는 '아카데미 하우스'의 역사가 적혀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탁 대표는 이전에도 서울시와 종로구가 리모델링한 인왕산 초소를 ‘더숲 초소책방’으로 운영하는 등 공간 재생 작업을 해 왔다. 하지만 그가 리모델링 설계 단계부터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곳의 재건을 위해 탁 대표는 “이제까지 공간 사업 투자금을 모두 합한 돈보다 더 많은 금액”을 사비로 지출했다.
'대화의 집'은 세미나와 강좌, 결혼식 등 행사를 열 수 있는 공간이다. 지난해 12월 '아카데미 하우스'의 60주년 행사도 이곳에서 열렸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더숲 아카데미 하우스’는 ‘아카데미 하우스’의 일곱 채 건물을 모두 사용한다. 골격과 외관 등 대부분 옛 모습을 살리는 방향으로 리모델링했다. 행사 공간이었던 ‘대화의 집’과 ‘새벽의 집’, 교육 공간으로 쓰였던 ‘내일을 위한 집’, ‘채플’과 식당이었던 ‘구름의 집’ 등은 원래대로 쓰임이 유지된다. 강 목사의 사택이었던 ‘여해의 집’은 연수자 등을 위한 숙박 시설로 사용된다.
'본관'의 북스테이 공간. 사진 속 공간은 객실이 아닌 책을 읽으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가장 많이 변한 건 ‘본관’이다. 탁 대표는 폐허였던 본관을 책을 읽으며 숙박할 수 있는 32개 객실 규모의 ‘북스테이’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현재 서점을 운영 중인 그가 주전공인 ‘책’을 들고 온 데는 이유가 있다. “과거의 대화가 강연과 토론의 형식이었다면, 이제 그 대화를 책을 통해 다시 시작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 우리 사회는 원자화(原子化) 됐다. 협업은 없고 경쟁만 있다”며 “대화를 통한 공동체성의 회복이 이뤄지면 민주화의 가치도 따라 세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강원용 목사의 사택으로 쓰였던 '여해의 집'. '사유의 여정'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이들이 숙박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개조 중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탁 대표는 공간을 찾는 사람들이 이런 가치들을 자연스레 느끼길 바란다. 결혼식을 하더라도 하객과 대화를 충분히 가질 수 있도록 하고, ‘내일을 위한 집’ 등엔 일하는 사람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도록 코워킹(Co-working) 가능한 공간을 만들고 있다.
교육이 이뤄졌던 '내일을 위한 집'. 사무실과 회의실 등이 구비되어 있고 워케이션이 가능한 공간으로 꾸미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대중적 신뢰가 높은 ‘30인의 인물 도서관’을 만들고 이들이 ‘주최자’가 되어 10~15명의 신청자와 1박 2일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프로그램 ‘사유의 여정’도 계획 중이다. 지금까지 주최자로 섭외된 인물은 법륜스님, 신인령 전 이화여대 총장, 김혜순·나희덕 시인, 조희연 전 서울특별시교육감 등 10여명이다.
탁 대표는 “미래에 투자하고 싶어 지은 공간”이라며 “이곳에 온 분들이 여유를 찾고, 영감을 얻길 바란다”고 했다. 재단장을 마친 ‘더숲 아카데미 하우스’는 6일 ‘본관’ ‘대화의 집’ ‘새벽의 집’ ‘채플’을 시작으로 4월 말 전체 공간을 연다. ‘사유의 여정’ 등 프로그램은 5월 중으로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받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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