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그날 밤 계엄군의 섬뜩한 시선...내란 다큐의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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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비상계엄 사태를 다룬 다큐멘터리 '란 12.3'의 한 장면. 사진 NEW
영화 ‘란 12.3’(22일 개봉)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부터 국회의 비상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 가결까지 긴박했던 시간을 96분의 러닝타임에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비상계엄 사태 다룬 다큐 '란 12.3' #내레이션,인터뷰 없는 실험적 작품 #이명세 감독 "내란 아직 안끝났다"
영화 소개엔 ‘시네마틱 다큐멘터리’란 설명이 붙어있다. 당시의 영상과 사진, 기록을 내레이션과 함께 엮어내는 통상적인 다큐가 아니라는 얘기다. 영화에는 내레이션도,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인터뷰도 없다.
대신 기록을 바탕으로 만든 이미지와 영상, 그리고 사운드 만으로 시민들의 일상이 얼어붙었던 그 순간을 한 편의 극영화처럼 재현해낸다.
12·3 비상계엄 사태를 다룬 다큐멘터리 '란 12.3'의 한 장면. 사진 NEW
이처럼 실험적인 작품을 연출한 이는 이명세(69) 감독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의 빗속 결투 신, ‘형사 Duelist’(2005)의 달빛 아래 칼싸움 신 등을 만들어내며, ‘탐미적 스타일리스트’라 불리는 이 감독이 왜 사회 참여적 다큐를 연출했을까.
7일 서울 용산 CGV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계엄 선포 직후 방송국을 찾아간 무장 군인들의 모습에서 강한 충격을 받았다”면서 “일상에 찾아온 위협을 보여주는 그 한 장면 만으로도 12·3 내란 사태를 설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영화 '란 12.3'을 연출한 이명세 감독. 사진 뉴스1
다큐의 출발점이 된 이미지는 언론인 김어준 씨를 체포하기 위해 뉴스공장 앞에서 대기 중인 한 군인의 시선이 위에서 찍고 있는 카메라와 마주치는 장면이다.
이 감독에게 그 날을 영화로 남겨보자고 제안한 이는 김어준 씨다. 그는 이 작품의 기획자 겸 투자자로 이름을 올렸다.
다큐는 시민과 국회의원, 보좌진 등 280여명이 제공한 영상과 사진, 기록을 토대로 만들었다. 시민들과 국회 보좌진이 특수 부대의 국회 진입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는 가운데, 국회가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가결시키는 과정을 입체적으로, 그리고 긴박감 넘치게 그려냈다.
12·3 비상계엄 사태를 다룬 다큐멘터리 '란 12.3'의 한 장면. 사진 NEW
12·3 비상계엄 사태를 다룬 다큐멘터리 '란 12.3'의 한 장면. 사진 NEW
시민들의 평온한 일상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장면,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 등이 패스트푸드 점에서 계엄 세부 계획을 모의하는 장면 등은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했다. AI(인공 지능)로 만든 이미지, 웹툰 스타일의 화면과 게임 CG(컴퓨터 그래픽)도 활용했다.
이 감독은 “일상을 엄습한 공포에 얼어붙지 않고 국회로 가기 위해 골목길을 나서는 사람들의 모습을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표현했다”면서 “노상원 모의 장면은 ‘병맛’같은 느낌을 살리기 위해 만화처럼 그렸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날 밤의 사건을 모르는 해외 관객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편집의 목표였다”며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을 온전히 전달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다큐에서 음악은 극을 이끌고 가는 내러티브 역할을 맡는다. 각각의 사건과 분위기에 걸맞는 음악이 적재적소에 배치되며, 내레이션과 인터뷰의 공백을 메운다.
이 감독은 30년 가까이 함께 작업해 온 조성우(63) 음악감독에게 1시간 반 분량의 교향곡 하나를 작곡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날 간담회에 함께 참석한 조 감독은 “기존 다큐와는 다른 형식적 실험에 의미를 뒀다”며 “‘미키 마우징’(영화에서 영상 이미지와 그에 딸린 음악 사운드를 정확히 일치시키는 기법)이나 무성영화적 문법을 적극 차용해 음악적으로도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영화사는 지난해 말 후반 작업을 위해 10억원 규모의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고, 시민 1만 5000여명이 참여해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이에 대해 이 감독은 “저는 영화감독으로서 ‘놀면 뭐 하나, 영화나 만들자’는 사람인데, 보내주신 성원에 무게감을 느꼈다”면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빛의 혁명’의 의미와 한국 민주주의의 가치가 해외에도 전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란 12.3’은 그날의 사건을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바쁜 일상 속에서 잊혀가는 소중한 교훈을 일깨운다.
‘그날 밤, 헬기가 제때 이륙했다면’, ‘군인들이 서강대교를 건넜다면’, ‘군인 중 누군가 발포했다면’, ‘시민들이 국회 앞으로 모이지 않았다면’ 등 섬뜩한 가정을 제시하며 민주주의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고, 방심하면 언제든 빼앗길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12·3 비상계엄 사태를 다룬 다큐멘터리 '란 12.3'의 한 장면. 사진 NEW
12·3 비상계엄 사태를 다룬 다큐멘터리 '란 12.3'의 한 장면. 사진 NEW
다큐가 1980년 5월 광주의 피비린내 나는 영상을 그날 밤의 긴박한 현장과 병치시킨 건 그런 이유에서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에서 건넨 질문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이 감독은 “내란의 밤을 반추하며 광주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어 “제게는 늘 때가 되면, 답답할 때마다 소환되는 시가 있다.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며 “살아남아 부끄러운 느낌을 영화에 온전히 표현하고 싶었다. 이 마음이 영화를 만들게 했다”고 덧붙였다.
다큐는 ‘THE END’라는 단어로 막을 닫는다. 그 너머로 ‘THIS IS NOT’이란 문구가 넌지시 노출된다. 이게 끝이 아니란 뜻이다.
이 감독은 “내란 사태가 아직 (사법적) 결론이 난 것도 아니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면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쓰인 첫 글자 ‘亂’을 따서 제목을 지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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