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옆 의원서 빌려 쓴다” 수액 백 사재기 정부 대책에 되레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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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석 의료기관에서 생리식염수를 담기 위해 쓰는 수액 백. 사진 독자 제공

서울에서 투석 전문 의원을 운영하는 내과 전문의 A씨는 요즘 의료기기 도매업체에 전화를 돌리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투석 치료에 필수적인 생리식염수를 담을 수액 백이 매주 200개씩 필요하지만, 구할 수 있는 물량이 절반 수준인 100개뿐이라서다.

A씨는 “의료기기 도매 업체에선 정부의 사재기 방지 지침으로 수액 백 공급량이 100개로 제한돼 더 못 준다고 하더라”면서 “부족분을 구하기 위해 소량이라도 달라고 읍소한다”고 말했다. 이어 “주변 병·의원끼리 남는 수액 백이 있는지 확인해서 빌리고, 물량이 채워지면 다시 돌려주는 식으로 겨우 견디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 달 넘게 이어지는 중동 전쟁에 따른 석유화학 원자재 수급 통제로 의료 현장에 비상이 걸렸다. 특히 중증 신장 질환자가 가게 되는 투석 의료기관이 수액 백 사재기를 막기 위한 정부 대책의 부메랑을 맞게 됐다.

12일 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다수의 투석 의료기관들이 생리식염수를 담을 수액 백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생리식염수는 투석 환자의 전해질 균형을 유지하고 탈수를 방지하는 등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 A씨는 “원래 투석 치료엔 생리식염수 백을 많이 쓸 수밖에 없는데, 이전과 동일한 양으로 주문해도 도매상에서 대량 구매는 안 된다고 한다”며 “가격도 20% 정도 올랐지만, 물량 자체를 구할 수 없는 게 문제”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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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이 6일 서울 양천구의 한 의원을 방문해 중동전쟁에 따른 의약품·의료기기 수급 관련 현장 의견을 청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온 배경엔 정부가 추진해온 사재기 방지 대책이 있다. 지난 7일 보건복지부는 공정거래위원회·식품의약품안전처·산업통상부 등과 의료제품 수급 대응 합동 브리핑을 열었다. 의료용품 시장 내 재고 부족 우려 등에 따른 후속 조치다.

정은경 복지부 장관은 “의료제품과 관련된 사재기와 담합 등 불공정행위는 예외 없이 엄정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정부의 대표적인 관리 품목 중 하나가 수액 백이다. 중동 전쟁으로 수급이 어려워진 나프타를 주원료로 하며, 의료기관에서 많이 쓰는 제품이라서다.

문제는 이러한 대응이 현장 상황 고려 없이 일률적으로 적용된다는 점이다. 투석 전문 의원을 운영하는 내과 의사 B씨는 “일주일에 수액 백 300개 정도 사용하는데, 공급 제한으로 100개만 들어오니 온갖 곳에 전화하며 긁어모으고 있다”며 “1000개를 달라는 것도 아니고 평소 쓰던 만큼 달라는 것인데, 이대로면 투석을 못 받는 환자가 나올 수 있다”고 털어놨다. 몇 주 못 버틴다는 하소연과 함께다.

정부는 현재 대응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식약처 관계자는 “일률적으로 공급량을 제한하지 않는다”면서 “과도하게 많이 주문할 때 공급을 자제해달라는 것이지, 평소 주문량만큼 주문할 때는 그대로 거래하도록 가이드라인을 현장에 주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생각지 못한 애로사항이 있는지 확인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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