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미국 대학은 동남아시아에 관심 없었다 [왕겅우 회고록-청년기(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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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부 내가 겪은 ‘세계화’
Enter the Cold War / 냉전의 시작

아시아재단의 존 서터가 미국의 아시아 연구 상황에 대한 내 소감을 적어 달라고 한 이유를 나는 모른다. 내게 미국 최고의 몇 개 대학에 접근할 길을 열어준 지원금을 받기에 내가 적합한 사람이라고 판단한 이유도 모른다. 내 보고서의 내용 중 재단에서 새로 알게 된 내용이 있었을 것 같지도 않다. 어쩌면 본 것에 대한 내 반응에 내 정치 성향이 비쳐지는 것이 관심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최근 인민행동당 정권이 석방한 정치범 중에 내 친한 대학 친구 몇이 있었다는 사실은 서터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미국 가기 전에 그곳에 관해 내가 알고 있던 것을 돌이켜보면서 내 초년의 삶에서 영국과 미국이 다른 범주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앤더슨학교에서 들은 미국 이야기는 용감한 영국인 개척자들이 적대적인 원주민 사이에 자리 잡았다는 것뿐이다. 13개 식민지를 제국에서 떼어낸 반란자들의 언급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중국인 가정에서는 더 들은 것이 있었다. 예를 들어 중국인 소학교 교과서에는 거짓말을 못하던 건국의 아버지 워싱턴과 노예를 해방한 링컨 이야기가 나왔다. 태평양전쟁 중에 미국은 중국과 같은 편 우방이었다.

난징에서는 이런 긍정적 모습도 정치화의 대상이 되었다. 친구 학생 중에는 미국의 간섭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미국 군부가 부패한 장제스 정권 편에서 인민이 지지하는 야당들을 적대한다고들 생각했다. 말라야대학에서 공부할 때 미국은 어느 과목에서도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영국인 교수들이 미국 외교정책의 순진성을 딱하게 여기던 생각도 난다. 노동당을 지지하는 교수들은 미국 지도자들이 자랑하는 자본주의 이념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미국의 반-식민 정책을 지지하던 사람들도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프랑스 편을 들자 등을 돌렸다. 냉전에서 새 민족국가들을 자기편으로 붙잡아놓으려는 미국의 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중립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진 것도 확실한 일이다.

나 자신의 미국 경험은 교육제도의 밖에서만 이뤄졌다. 대중영화가 있었다. 셜리 템플의 영화, 〈톰 소여의 모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유럽과 태평양에서 승리를 거두는 미군 모습을 그린 전쟁영화, 그리고 총이 모든 것을 말하는 서부영화가 있었다. 미국 문학작품을 읽은 것도 교실 밖이었다. 월트 휘트먼에서 에드가 앨런 포와 로버트 프로스트까지, 그리고 유럽에도 명성을 떨친 T.S. 엘리엇, 에즈라 파운드, 헨리 제임스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있었다.

존 서터와 만나기 전에 싱가포르와 런던에서 만난 미국인이 몇이나 되었나? 말라야대학과 소아스의 교수 중에는 없었다. 자리 잡은 아시아 연구자를 처음 만난 것은 파리 학회에서 본 하버드대학의 벤저민 슈워츠였다. 1957년 싱가포르에 돌아온 후에야 많은 미국인 연구자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 학자들의 관심은 말라야 독립 후 늘어났다.

쿠알라룸푸르(KL)로 옮긴 후 우리 대학을 찾아오는 미국인 학자들과 관리들을 많이 만났다. 그 무렵에 나는 지역 내 주변국들에 관해 많이 읽으면서 미국 학자들의 관심이 필리핀을 넘어 베트남과 태국, 그리고 갈수록 적대적으로 되어 가는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로 넓혀지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버마가 독립 후 영연방 가입을 거부하자 그곳의 관심도 커졌다. 반면 말라야와 싱가포르에 대한 영국의 통제는 확고하다고 보았는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말라야에서 영국기가 내려간 후에야 미국인의 방문이 많아졌다.

New World Report / 신세계 보고서

1960년 초 4개월 동안 14개 미국 대학을 방문했다. 각 학교가 전쟁 후 아시아의 변화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비교해 볼 기회였다. 미국이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지역에 어떤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아볼 기회이기도 했다. 대부분 미국 대학이 아시아 연구에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내가 알아낸 가장 중요한 사실이었다. 태평양전쟁을 거쳐 “중국의 상실”을 겪으면서 미국은 냉전을 전후 세계에서 미국 국익에 대한 위협으로 보게 되었다. 그런데도 미국인들은 유럽 제국들이 만들어놓은 조그만 새 국가들이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이 지역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시아재단의 문제의식이었다.

존 서터는 내가 어느 학교들을 방문하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지 물어본 다음 각 학교를 파악하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좋을지 의견을 주었다. 4월 초 뉴욕에서 열릴 아시아연구협회 대회 일정을 감안해서 그 전에 서부와 중서부에서 지낼 기간을 잡아주었다. 여러 도시에서 미국의 정치제도와 문화-사회에 관해 약간의 이해라도 키울 수 있도록 주말을 비워놓는 배려도 있었다.

1960년 1월 중순에서 5월 중순까지 여행했다. 일정은 빡빡했다. 새로 알게 된 사실을 모두 적지는 못하겠고, 두 영역에 집중한다. 하나는 아시아 연구의 상황과 전망에 관한 것이다. 또 하나는 만난 중 특별한 사람들, 과거와 현재의 의미에 대한 내 이해를 바꿔준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하와이는 잠깐 머문 경유지였다. 그곳 대학은 동서간 교량의 역할을 지향하면서 국가의 지원을 받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학자와 학생들을 모으는 기관을 세우려는 참이었다. 그러나 미 의회가 동양 사람들을 미국에 가깝게 해줄 동서문화연구소 지원을 결정한 사실은 두 달 후 워싱턴 DC에 도착한 뒤에야 들었다. 하와이대학에는 일본 연구가 좀 있었고, 러일전쟁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를 만났다. 동남아시아를 연구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시애틀의 워싱턴대학은 아시아 연구가 활발했고, 극동연구소와 러시아연구소가 모두 중국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극동연구소 소장인 영국인 조지 테일러 교수는 미국과 중국 양쪽에서 역사를 공부했고 태평천국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중국 연구팀에서 낸 출판물의 수준도 놀라웠는데, 특히 뛰어난 대학원생들의 존재가 눈에 띄었다. 최근 중국에 돌아간 장중리(張仲禮, 〈The Chinese Gentry〉의 저자)와 컬럼비아대학으로 건너간 칼 위트포겔(요 왕조의 연구자이며 〈Oriental Despotism〉의 저자) 같은 일류 학자들이 빠져나갔으나 여전히 막강한 연구팀이었다. 미국 여행을 끝낼 때는 워싱턴이 하버드와 힘께 가장 풍족한 예산을 쓰는 중국학 중심지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많은 중국 연구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던 서양 대학을 처음으로 구경한 기회였다. 샤오공취안(蕭公權), 로룽방(羅榮邦), 장중리, 태평천국의 이념을 연구한 빈센트 스위충(施友忠), 언어학자 리팡궤이(李方桂) 외에 영국의 테일러, 독일의 미하엘과 헬무트 빌헬름 등 유럽인들도 있었고 대부분 현대사를 연구하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 유럽에는 중국 연구에 사회과학과 중국학을 결합시키는 학술기관이 없었다. 이곳에서는 새로운 “지역학”을 앞장서서 발전시키고 있다는 것이 제일 처음 든 생각이었다.

캘리포니아 베이 지역으로 내려가 3주일을 지냈다. 첫 주일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나머지 두 주일은 버클리 캠퍼스에서 지냈다. 아시아재단을 방문한 후 스탠퍼드대학에 가서 후버도서관에 수집되어 있는 현대중국 문서를 보고 놀라자빠졌다. 중국공산당과 말라야공산당의 게릴라 전술 자료까지 있었다. 내가 런던 아닌 캘리포니아로 공부하러 왔다면 중세 이전의 역사로 돌아가지 않고 20세기 군벌시대를 연구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전문화된 문헌을 갖춘 도서관은 중국에서도 찾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는 해외 중국인 연구를 막 시작하고 있었는데, 동남아시아 각지의 중국인 사회와 관계된 문서를 모아놓은 데도 감탄했다. 그처럼 치밀하고 방대한 소장 문헌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러니 현대 중국 연구자들이 스탠퍼드로 끌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버클리의 국제관에 입주해서 더 긴 시간을 보냈다. 첫 아침식사 때 만난 사람이 다른 사람 아닌 내 스승 C.N. 파킨슨 교수였다. 장기간의 “파킨슨의 법칙” 순회강연 중이라고 했다. 말라야대학 교수로 있다가 얼마 전 버클리 지리학과로 옮긴 폴 휘틀리 교수도 그날 만나 댁으로 저녁 초대를 받았다. 고대 중국의 해상교역에 관심을 공유하며 알고 지낸 사이였다.

버클리 도서관에서는 20세기 초 이후 다량의 중국 지역신문이 소장되어 있는 것도 보았다. 사업 관계 뉴스 외에 캉여우웨이의 보황회(保皇會)와 쑨원의 동맹회(同盟會) 활동에 관한 기사도 많았는데,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읽은 자료와 호응이 되는 것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중국인 배제법(Chinese Exclusion Act)의 영향, 그리고 차이나타운 구역을 강타한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의 영향을 살필 수 있는 자료들도 있었다. 북아메리카의 차이나타운과 중국 이주민의 경험을 더 많이 알게 되면서 남양 화교 연구를 더 큰 틀로 키울 생각이 들었다.

버클리는 워싱턴과 스탠퍼드에 비해 균형이 잡혀 있었다. 고대 중국과 현대 중국의 자리 잡힌 연구자들이 있었고 동남아시아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고 있었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중국학 연구자는 에드워드 셰이퍼였는데, 당나라 때 물질문화와 교역상품에 관해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내 〈남해 교역〉을 읽었다며 당-오대 시기(7-10세기) 교역과 관계된 모든 것을 담은 카드 목록을 보여줄 때는 정말로 기가 죽지 않을 수 없었다. 매카시위원회가 학자들에게 요구한 충성 서약을 거부하는 운동을 주도함으로써 많은 존경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나도 경의를 품게 되었다.

다음 목적지 세 곳은 존 서터의 조언을 받으며 본격적 아시아 연구가 시작되려는 곳으로 정했다. 투슨의 애리조나대학, 볼더의 콜로라도대학과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대학이었다. 이 세 학교에는 아시아 관계 큰 프로그램이 없었다. 세 곳 모두 내게 강연을 청했다. 존 서터의 권유에 따라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정치에 관한 강연을 했다. 강연의 초점을 말레이인 해양세계의 재구성, 특히 다양한 인구집단으로 민족을 건설하는 노력에 두었다. 필리핀과 해양세계의 다른 두 나라 인도네시아와 말라야와의 차이가 무엇인지, 그곳에서 역할이 큰 중국계 인구는 어떤 모습인지, 학생들의 질문이 많았다. 콜로라도에서는 인종 간 결혼금지법이 몇 해 전 철폐되어 있어서 유라시안 등 인종 간 결합 현상을 마음 놓고 설명할 수 있었으나 세인트루이스에서는 인종 간 결혼에 대한 반감이 있을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 얘기를 뺐다. 미합중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복잡한 나라인지 보여준 또 하나 지표였다.

3주 동안 여섯 차례나 강연을 했지만, 세 도시의 방문은 시카고와 동북부로 향하기 전의 휴식기였다고 할 수 있다. 시카고에서부터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H.G. 크릴과 에드워드 크래크가 이끄는 “동양학자”들을 찾아갔다. 크릴은 중국의 이해를 위해 그 고전적 사상과 제도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주장에 열을 올렸다. 내가 데니스 트위체트와 함께 한 일을 알고 있던 크래크는 당 후기에서 오대에 걸친 시기에 유가사상의 핵심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두 사람 다 내가 교육에서나 연구에서나 중국학의 전통을 지킬 것을 권했다.

그러나 나는 현대중국 연구의 새 미국 학풍을 주목하고 있었다. 시애틀과 베이 지역에서 마주쳤고 시카고에서도 볼 수 있는 학풍이었다. 지금의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학만으로 부족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중국이 두 차례 혁명을 통해 어떤 변화를 겪었고, 또 어떤 변화가 예상되는지 파악하는 데 사회과학에서 제기되는 새로운 질문들이 필수적이라고 보였다.

방법론적 문제를 별로 느끼지 않는 두 사람을 만나서 기뻤다. 하나는 도널드 라크, 내가 말라야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던 시기인 16-18세기 연구자로 근대유럽 발전에 아시아의 사상과 제도가 끼친 영향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제기한 질문들을 내 강의에 넣을 것을 마음에 새겼다. 또 하나 첸준쉰(Tsien Tsuen-hsuin 錢存訓)은 시카고대학 동아시아서고(書庫) 책임자였다. 아버지 친구로 런던의 우리 결혼식에서 마거릿을 넘겨주는 역할을 맡아준 외교관 첸준뎬이 그 형이었다. 예의상 찾아간 자리가 열띤 토론장이 되어 제지술과 인쇄술 이전의 서적에 관해 많은 것을 새로 배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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