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中축구 몰락 데자뷔”…사우디 돈줄 끊기자 ‘스포츠 재앙’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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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프로축구 알나스르 호날두, 사우디에서 열린 테니스대회에서 우승한 야닉 시너, 리야드에서 개최된 e스포츠 월드컵에 참가한 한국팀 젠지(위에서부터). [로이터·신화=연합뉴스]

‘오일 머니’로 국제 스포츠계에 동시다발적으로 발을 뻗은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PIF)가 지갑을 닫기 시작했다. LIV 골프 중단설로 시작된 PIF의 스포츠 투자 철수가 생각보다 광범위하다. 골프 뿐 아니라 축구, 테니스, e스포츠, NBA까지 거의 모든 종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을 빼는 중이다.

불씨는 LIV 골프에서 터졌다. 파이낸셜타임스 등은 PIF가 누적 53억 달러(약 7조8100억원)를 투입한 LIV 골프에 대한 지원을 끊는 방안을 저울질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폭스뉴스는 “2026시즌이 끝나면 사우디의 자금 지원은 확실히 종료된다”고 못 박았다. 골프 전문 기자 앨런 십넉은 “LIV가 이란 전쟁을 ‘불가항력’으로 주장해 선수들과의 기존 계약을 무효화하려 한다는 얘기를 에이전트 측으로부터 들었다”고 전했다. 세계 최고의 골프 선수들을 억대 달러로 영입해 놓고, 전쟁을 핑계 삼아 약속한 돈을 지급하지 않겠다는 논리다.

여러 매체들이 쏟아낸 LIV 골프 지원 중단설 탓에 현장은 매우 혼란하다. 설상가상으로 최근 막을 내린 LIV 멕시코시티 대회와 관련해 선수와 직원, 용역 업체에 대금이 지급되지 않았다는 보도가 추가됐다. 골프 전문 리포터 라이언 프렌치는 “선수들이 오늘 돈을 받지 못했고, 전기 요금이 미납돼 전력이 끊겼으며, 직원들도 급여를 받지 못했다”는 내부 제보를 공개했다. 일부 선수들은 정산이 보장되지 않으면 출전을 거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대회 첫날 중계 화면은 ‘기술적 문제’라는 안내문만 뜬 채 먹통이 됐다. LIV 골프 CEO 스콧 오닐이 “2026시즌은 계획대로 전속력으로 진행한다”는 이메일을 전 직원에게 보내며 급히 진화에 나섰지만, 안팎으로 이미 퍼진 불안감은 좀처럼 누그러질 줄 모른다. “불확실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현지 해설위원의 말이 상황을 압축했다.

골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PIF는 사우디 프로축구리그(SPL) 소속 명문 알힐랄 구단 지분 70%를 사우디 왕실 계열 지주회사에 넘겼다. 뿐만 아니라 SPL로 데려오는 선수들의 이적료 지출도 이미 대폭 줄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네이마르, 카림 벤제마 등을 쓸어 담던 세계 축구 시장의 ‘큰 손’이 작동을 멈춘 것이다. 재정건전성 기준 도입도 피할 수 없는 수순이다.

테니스에서는 여자프로테니스(WTA) 투어 파이널이 2년간 리야드에서 열렸지만 2027년부터 새 개최지를 찾아야 한다. 미국프로농구(NBA) 유럽 리그 창설 논의 과정에서도 PIF를 등에 업은 뉴캐슬은 사전 입찰 마감 직전 응찰을 포기했다. e스포츠도 휘청댄다. 리야드에서 성황리에 열렸던 e스포츠 월드컵의 운명 역시 PIF 지갑이 얼마나 더 버티느냐에 달려 있다.

PIF의 공식 입장은 2026~2030년 신규 전략 보고서에 담겼다. 투자 포트폴리오를 국내 사업 중심의 ‘비전 포트폴리오’, 국가 핵심 자산의 ‘전략 포트폴리오’, 글로벌 투자의 ‘파이낸셜 포트폴리오’ 세 축으로 재편하면서 당초 핵심 투자 분야 중 하나였던 스포츠 항목을 아예 없애버렸다.

PIF가 투자를 줄이려는 건 열악해진 자금 사정에 원인이 있다. 춤추는 원유 가격에 자국 내 인프라 건설 비용 급증이 맞물렸다. 이란 전쟁 여파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사우디의 원유 수출이 절반 가까이 쪼그라든 것도 결정적이었다. 향후 신규 투자는 2034년 FIFA 월드컵 유치 등 국가적 필수 과제 외에는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돌이켜보면 ‘돈으로 스포츠 지형을 바꾸겠다’는 시도가 처음은 아니었다. 2015년 전후 중국은 시진핑 주석의 ‘축구 굴기’ 기치 아래 자국 프로축구(수퍼리그)에 수십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오스카르, 카를로스 테베스 등을 천문학적 연봉으로 데려왔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내부에서 자라난 구조가 없었기에 투자가 멈추자 리그 자체가 허물어졌고, 여러 구단이 파산하며 조용히 사라졌다. 돈이 만들어낸 성장은 시스템과 팬덤이 뒤따르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PIF가 가고 있는 길은 그 길과 묘하게 겹친다.

지난 수년 간 PIF를 앞세워 투자한 천문학적 자금은 사우디가 세계 스포츠 질서의 중심부에 손쉽게 진입하기 위해 지불한 ‘암표값’에 가깝다. 하지만 정당하게 줄을 서지 않고 구입한 티켓으로는 기대했던 ‘1등석’에 앉기 어렵다는 결론에 가까워진 모양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사우디가 티켓 구매 과정과 영수증을 꼼꼼히 챙기며 점검에 나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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