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참기름집 옆에 갤러리?…길 따라 이어진 요즘 페어의 묘미 [비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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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주말을 맞아 찾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홍제천을 따라 이어진 골목마다 분홍 리본을 가방에 두른 사람들로 가득하다. 10일부터 19일까지 열린 ‘연희 아트페어’를 보러 온 관람객들이다.
연희동을 거점 삼은 갤러리 21곳의 연합으로 열린 연희 아트페어. 각 공간을 동네 여행 다니듯 작품을 관람하는 점이 특징이다. 이소진 기자
아트페어라고 하면 넓은 박람회장의 부스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 페어의 주요 무대는 재개발을 비켜간 옛 상가과 주택이 늘어선 골목이다. 세월이 깃든 참기름 집과 동네 슈퍼가 자리한 50년 된 낡은 상가에는 갤러리 11곳이 몇 발짝 차이로 자리 잡고 있다. 간판 없는 곳도 많아 평소에는 ‘여기 갤러리가 있었어?’라며 지나치기 쉬운 이곳에서 아트페어가 열리고 있다. 미술학도 임채영(28) 씨는 “이렇게 숨은 곳을 찾아다니는 게 묘미”라며 만족감을 나타냈다. 평소 작가들의 네트워크 공간으로 쓰이는 ‘AADx필승사’도 연희 아트페어 때만 공개됐다. 전시 기간이 제 각기인 갤러리들이 이 기간만큼은 문을 활짝 열어두니 한 번에 여러 곳을 방문할 수 있다.
길 따라 열리는 예술 상점
홍연길 갤러리 골목에는 작고 개성있는 갤러리들이 오밀조밀 밀집돼 있다. 도슨트를 따라 갤러리를 탐방하는 '그림사러 산책'에 참가한 관람객들. 이소진 기자
연희 아트페어는 코엑스처럼 대형 컨벤션에서 열리는 기존 박람회와 달리 갤러리를 거점 삼아 열리는 ‘거리형 아트페어’다. 부스가 늘어선 박람회 장이 아니라, 길로 이어지는 페어다. 지난 2020년 첫 회를 시작으로, 해를 거듭하며 관람객이 공간을 이동하며 작품을 경험하는 새로운 관람 문화를 정착시켰다. 수천에서 수억 원을 호가하는 그림도 없다. 대부분 신진 작가나 유명 작가의 소품을 위주로 30~200만 원대로 형성돼 있다. 갤러리들의 노력으로 작품 선택의 폭은 넓히고 구매 문턱은 낮춘 것이다.
이 행사를 처음 만든 건 연희동 갤러리 골목의 터줏대감인 ‘아터테인’이다. 미술 불모지였던 골목에 2014년 아터테인이 문을 열고, 이후 플레이스막·갤러리 인HQ·갤러리민트 등 동료 갤러리가 하나 둘씩 자리 잡으면서 지금의 ‘홍연길 갤러리 거리’가 형성됐다. 홍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예술인들이 보다 저렴한 공간을 찾아 이동하는 과정에서, 교통은 다소 불편하지만 한적한 이곳을 새로운 터전으로 삼았다.
작품를 설명하는 갤러리 아터테인 황희승 공동대표. 느슨한 연대와 지역 성장을 지향하며 2020년부터 매해 연희 아트페어를 주최·주관해 왔다. 이소진 기자
황희승 아터테인 공동대표는 “비싼 부스 비를 내고 참가하는 기존 아트페어와 달리, 연희동의 갤러리들이 자체적으로 뜻을 모아 개최하는 지역 잔치에 가깝다”며 “행사 초반에는 작가나 기획자 등 업계 관계자 방문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지역 주민과 미술 애호가들이 늘었다”고 전했다.
연희정음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들. 기존 주택의 구조를 살려 다락방을 작업실처럼 꾸리고, 마당에는 작품의 일환으로 관람객이 신문을 읽도록 설치했다. 이소진 기자
홍연길에서 시작한 아트페어는 사러가마트 근처인 연희맛로까지 외연을 확장했다. 이곳에는 박서보재단 미술관과 한국 1세대 건축가 김중업의 말년 주택을 새롭게 단장한 연희정음을 포함해 8여개의 갤러리가 분포돼 있다. 연희동을 찾은 관람객들은 작품만 감상하지 않고, 골목의 다른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었다. 갤러리를 이동하다가 커피 한 잔 마시고, 잠깐 서점에서 한눈 팔기도 하는 등 골목만이 연출할 수 있는 광경이다. 장웅조 홍익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연희 아트페어는 단순한 예술 상점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지역성을 만드는 실천”에 가깝다며 “예술이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동네를 새롭게 읽히고 경험하도록 만든다”고 설명했다.
골목은 커뮤니티로 이어진다
올해 2회를 맞은 연희커피페스티벌은 8곳의 지역 카페와 빵·디저트·음식 공간 6곳을 소개했다. 사진 연희 커피 페스티벌
박람회장이 아닌 길에서 열리는 요즘 페어는 커피 등 라이프스타일 분야로도 확장하고 있다. 연희동은 이름난 카페와 개성 있는 스페셜티 커피숍이 공존하는 지역이다. 스페셜티 커피 산업이 보통 임대료가 저렴한 지역에서 시작된 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밀려나는 흐름을 보이는 것과 달리, 교통이 다소 불편한 입지 덕분에 고유의 분위기를 유지한 채 발전해왔다.
지난 10일부터 12일까지 열린 연희 커피 페스티벌은 지역 대표 카페인 ‘메뉴팩트 커피’와 커피 칼럼니스트 심재범 작가가 로컬 커피 문화를 조명하기 위해 기획한 행사다. 올해 2회를 맞아 스페셜티 커피 및 F&B 공간 14곳이 참여했다. ‘인기 카페’ 정도로 인식됐던 공간과 ‘맛집’ 프레임에 가려 있던 제빵사의 장인정신이 페스티벌 안에서 ‘지역 문화’로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연희 커피 페스티벌이 열린 주말 오후, 카페 비전스트롤에 방문한 사람들. 인증샷 찍기보다 동네의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다. 이소진 기자
기획자로 참여한 심 작가는 “일부러 행사 조직을 만들지 않은 이유는 연희동의 커피 매장이 서로를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고 동료로 존중하는 문화가 있기 때문”이라면서 “연희동은 동네를 아껴온 주민과 예술가, 지역 특유의 여유로움을 사랑하는 방문객이 어울리며 교류 자체가 즐거운 경험이 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지역의 자생 문화를 중심으로 한 축제와 행사는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개성 있는 디자인 스튜디오와 작가들이 모인 을지로에서는 IBK기업은행의 주도로 ‘을지 폴리’ 아트 페스티벌이, 작은 상점과 문화 공간이 밀집한 서촌에서는 36곳을 연결해 지역성을 조명한 ‘에디션 서촌’이 이목을 끌었다. 최근 성수동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이어졌다. 패션 플랫폼 ‘무신사’는 상대적으로 침체한 서울숲 일대를 활성화하기 위해 ‘다시, 서울숲’ 캠페인을 진행했다. 식·음료 중심이었던 상권에 패션과 라이프스타일 콘텐트를 결합해 거리의 구성을 다양화하려는 움직임이다.

지난해 10월, 서울 종로구 서촌에서 열린 '에디션 서촌' 행사 장면. 지역 정체성을 바탕으로 젊은 아티스트·상업공간·브랜드를 엮은 로컬 아트위크 축제를 펼쳤다. 사진 어반플레이
앞서 소개한 연희동의 사례는 어느 지역에나 쉽게 적용되는 건 아니다. 지역만의 특성은 물론, 지역의 터를 잡고 있는 구성원이 어떤 방향성을 공유하는지 중요하다. 많은 이해관계가 얽힌 상업 공간에서 쉽사리 골목 페어가 발현하기 어려운 이유다.
저명한 미국의 도시학자 제인 제이콥스는 “도시는 어떤 논리로 설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제 골목은 단순한 상권이 아니라 사람과 취향, 이야기가 축적되는 ‘커뮤니티의 단위’로 진화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공간의 입지나 조건이 아니라, 그 안에서 관계를 만들어가는 주체와 방향성이다. 이 속에서 형성된 지속적인 연결이 결국 지역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된다.
b.로컬
로컬은 지역의 가치를 새로운 기회로 전환하는 미래 라이프스타일 산업입니다. 비크닉이 로컬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브랜드와 크리에이터를 만납니다. 정부·지자체·기업이 참여하는 새로운 지역 활성화의 움직임을 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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