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마음만 먹으면 부자 될 그 자리, 아버진 되레 본인 월급 깎았다 [왕겅우 회고록-청년기(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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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연결
본문
Part 8. Roots / 뿌리
Three Generations / 3대(三代)
언젠가 70대 나이의 영국 친구에게 건강이 어떤지 물었을 때, 부모 잘 고르는 일이 중요하다는 묘한 대답을 들었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나는 진짜 잘 고른 사람이다. “사랑(love)”이란 말이 중국어의 “애(愛)”와 꼭 맞지 않는 데서 오는 어려움을 적은 일이 있다. “애”는 보통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고, 의무와 보호의 뜻이 곁들여진다.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태도는 “엄(嚴)”으로 표현된다. 아버지의 뜻은 따라야 한다는, 권위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상당한 거리감이 함축된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태도는 “효(孝)”를 지향한다.
자라나면서 어머니의 사랑은 늘 분명히 느껴졌고, 아버지는 말수가 적으셔도 엄하신 일이 없었고, ‘효’라는 말은 조부모님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에 관해서만 쓰였다. 부모님과 나의 관계에는 ‘효’가 의식되는 일이 없었다. 되돌아보면 ‘애’가 ‘효’를 이긴 것 같고, 부모님 모두 의무와 보호의 자세를 지키셨는데, 어머니의 친밀한 사랑 표현에 비해 아버지는 조심스러운 편이었던 것 같다. 두 분 다 어버이로서 의무에 충실하셨고, 나를 보호하는 자세에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세월이 지나며 “애”가 의무와 보호를 곁들인 사랑을 가리키는 말이고 부모님이 서로를 대하는 자세도 그 범주에 드는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집 아닌 곳에서〉에 그린 내 어린 시절의 한 가지 요소는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무엇을 하고 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가르친 점은 두 가지뿐이었다. 할 수 있는 대로 공부를 많이 하라는 것과 커서 좋은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어머니 관점에서 “좋은 사람”의 표본은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고전문헌을 가르쳐준 것은 중국인으로서 우리 과거와 연결을 지키라는 뜻이었다. 두 가지 가르침 위에서 내 갈 길은 내가 스스로 찾아내게 맡겨져 있었다. 막연한 가르침이지만, 더러 내가 길을 벗어나지 않을까 걱정되실 때에도 내게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할 일과 안할 일을 내가 결정하게 맡겨놓으셨다.
그분들이 겪은 세상으로부터 갈수록 달라지는 세상에 내가 스스로 적응할 길을 찾게 만드는 그분들 나름의 교육방식이었다. 세상이 계속 변해갈 것을 그분들은 지혜롭게 내다보고 그 안에서 살 길은 내가 알아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중국인 사회에서 세 식구의 핵가족은 새로운 현상이었다. 이 현실 앞에서 대도시나 외국 지배 구역의 주민들이 받아들이기 시작한 현대식 생활방식을 그분들도 받아들이신 것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싱가포르로 떠난 후 그분들 곁을 떠나 지내게 되었다. 방학에 이포나 쿠알라룸푸르(KL)로 가도 기껏 보름가량 지냈다. 아버지가 조기퇴직 후 대영박물관에서 연구하기 위해 1년간 영국에 와 계실 때 마거릿과 나는 두 달 동안 같은 도시에서 지내다가 케임브리지로 이사했다. 1957년 싱가포르로 돌아오자 같은 도시에서 지낼 수 있어서 거의 매주 뵈며 지냈다. 그러다 2년 후에 우리가 KL로 갔는데, 아버지도 KL로 갈 계획을 세우다가 조호르바루의 푼유중학 교장으로 가시게 되어 다시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페탈링자야에 집을 지을 때 마거릿은 아버지 퇴직 후 그분들이 함께 지내시도록 별채를 설계했다.
결국 그렇게 되지 못했다. 우리가 캔버라에 간 후 1969년 5월 13일의 KL 폭동사태와 국가정책의 비상사태 전환으로 말라야대학 귀환을 서두르지 않게 되었다. 1971년에 마거릿과 나는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ANU)에 그냥 있기로 했다. 그때는 아버지의 퇴직 후였는데, 부모님이 캔버라에 한 번 오셨다. 동양학 회의에 참석하실 일도 있었지만, 건너와 살면 어떨까 알아보러 오신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심한 감기로 며칠 고생하셨고, 어머니는 캔버라 기후가 안 맞다고 판단해 조호르바루에 계속 살 계획을 세우시겠다고 했다. 이듬해 우리가 3개월간 영국에 갈 때 아이들을 그분들께 보내 푼유중학에 다니게 했다. 부모님은 너무 좋아하셨는데 아이들이 거기 있는 동안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조호르바루에 묻히셨고, 어머니는 당분간 묘소 가까이 있고 싶다며 4년 후에야 우리랑 함께 살러 오셨다.
5-13 사태: 1969년 5월 10일 총선에서 중국인계 야당들이 큰 성과를 올린 후 그 축하 행사에서 도발적 표현이 많이 나오자 자극받은 말레이 군중이 공격에 나섰다. 사망자가 196명으로 공식 발표되었으나 실제로는 6~800명으로 추정된다. 툰쿠 수상이 퇴진하고 말레이시아의 다민족국가 체제가 큰 충격을 받았다.
마거릿과 나는 먼 앞날의 계획을 미리 세우는 일이 별로 없었으나 한 가지 세운 계획은 아버지 은퇴 후 모시고 살려는 것이었다. 여러 해 후 마거릿이 싱가포르와 KL의 생활을 기록하면서 아이들에게 조부모님을 알게 하고 싶어 하던 마음을 이렇게 적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떻게 지내고 계셨나? 런던에서 싱가포르로 돌아온 후 어느 중국인학교 교사숙소에서 살고 계셨다. 중국에서 직원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것처럼 싱가포르의 중국인학교들도 교사 숙소를 제공하고 있었다. 썩 좋은 숙소는 아니라도 묵을 곳이 필요하다면 그런 숙소에서 방 한둘을 빌릴 수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런 숙소에서 지내고 계셨다. 공동취사장에서 음식을 해드릴 하녀 하나를 같은 숙소에 묵게 하고 계셨다.
할아버지 은퇴 후 두 분이 서점을 꾸리려는 생각이 있으셨다. 평생 저축할 여유가 없던 할아버지에게 그럴싸한 계획 같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그분은 장사 체질도 아니었다. 친구인 고객에게는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아 장사를 망쳐버릴 것이었다. 할머니도 사업에 관해 아시는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애초에 불가능한 꿈이었다.
1958년 말경 조호르바루의 푼유중학 이사회에서 할아버지를 교장으로 초빙했다. 학생들, 교사들, 그리고 재정 상황의 평판이 모두 좋지 않은 학교여서 매력적인 초빙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어려운 여건에서 학교 운영을 어떻게 해낼지 자신 없어 하셨으나 많은 고민 끝에 가기로 결정하셨다. 그분이 하신 결정 중에 가장 훌륭한 결정의 하나가 된다.
할아버지는 그 학교를 바꿔놓았다. 제일 먼저 당신 봉급을 8백 달러에서 7백 달러로 줄여 시범을 보였다. 그리고는 교재 주문 등 돈에 관한 일을 담당 부서에 맡기고 일절 관여하지 않으셨다. 학교에는 많은 돈이 돌아간다. 마음만 먹으면 학교 지출에 대한 사례금만으로도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정직과 신뢰의 문화를 그 학교에 세워 10년 후 떠나실 때는 학생이 늘어 건물 몇을 더 지어놓았을 뿐 아니라 당시로는 엄청난 금액인 25만 달러가 학교에 비축되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또한 교과목 개선과 우수한 교사 초빙에 힘쓰셨다. 중국인학교 교사 급여는 공립학교보다 적었다. 장기계약이 없고 1년 단위로 채용했다. 교원 사기를 높이기 어려운 여건이었다. 학생 숫자의 증감을 예측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등록금에만 의존하는 사립학교라서 다음 해 학생 숫자가 줄어들면 있던 교사 전원에게 봉급을 줄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재직 중 학생 수를 두 배로 늘려 학교의 번영을 가져왔다.
1969년 은퇴 때는 자랑스러운 업적을 쌓아놓고 계셨다. 장학관 일을 하실 때도 존경받기는 하셨으나 한낱 공무원으로 영국 정책을 실행하는 역할이었다. 정책을 만들고 이끄는 역할이 아니었다. 그러나 개별 학교의 교장으로서 학교 발전의 청사진을 그리고, 실천을 통해 그 청사진을 실현하신 것이다.
1972년 2월 그분이 돌아가신 후 그분 옛 제자 한 사람의 말을 잊을 수 없다. 일개 건달(流氓)로 지내던 자신이 할아버지 덕분에 좋은 직업을 가진 착실한 시민이 될 길을 찾았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학생들에게 착한 사람이 되려는 의욕을 심어주셨다. 그 제자는 할아버지가 교육자로서 큰 ‘영광’을 이루었고 그 영광은 돌아가신 후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동료와 제자들의 그런 존경을 받았다는 이야기에 감동되었다. 생의 마감을 앞두고 마침내 마땅히 받으실 인정을 받으신 것이다.”
We Build A House / 우리가 지은 집
직장을 가진 지 8년이 안 된 젊은 부부가 자기 집을 짓는다는 것을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젊은 교수들이 집을 짓도록 장려하고 저리 융자로 건축비를 제공하는 말라야대학 정책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해외 초빙 교수들의 사택을 넉넉히 확보하기 위한 정책이기도 했다. 페탈링자야 같은 신흥 택지에는 땅이 넉넉하고 비싸지 않아 가능한 정책이었다.
이 정책이 시행되자 우리는 단지를 둘러보다가 우리에게 맞는 부지 하나를 찾았다. 아버지 은퇴 후 부모님을 함께 모실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이고 막힌 골목에 면해 있어서 조용할 곳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 당시 생각을 마거릿의 기록으로 살펴본다.
“(1962년) 영국에서 돌아온 후 두 차례 이사했다. 처음에 페탈링자야의 감리교소학교 뒤의 임시주택에 들었다가 얼마 후 로롱일무의 새 단지에 있는 대학 사택으로 옮겼다. 새 대학병원에서 가까운 곳인데, 말굽 모양의 부지를 둘러싸고 집들이 지어져 있었다. 널찍했다. 침실 넷에 하인-하녀 방들이 뒤쪽에 있고 야생 상태의 정원이 있었다. 첫 입주자인 우리는 즐길 만한 정권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식물을 들여왔다.
1962년에 교직원 자택 건축을 장려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대학 당국이 이용자에게 유리한 융자 제도를 기획했다. 현지 출신 교직원들은 자기 집 가질 기회로 환영했다. 할아버지의 은퇴 후 두 분이 우리와 함께 살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은퇴의 의미와 학자의 생활방식에 관한 구식 관념을 아직도 갖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겅우의 연구를 도우며 둘이 책도 함께 쓸 생각을 하고 계셨다. 옛 중국에서는 가능한 꿈이었겠지만 오늘날의 학자란 틀어박혀 철학과 시문(詩文)의 토론으로 세월을 보내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겅우는 활동적인 사람이고 학자일 뿐 아니라 지도자와 행정가의 역할도 가진 사람이었다. 이 점에서 할아버지는 아들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다.
어차피 겅우는 연구에 조수를 쓰는 일도 없었다. 자기 연구를 늘 혼자서 한 것은 자기가 보는 것을 다른 사람도 똑같이 보면서 무엇이 중요한지 아닌지 판별해줄 것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연구조수를 쓴 일이 없다. 할아버지가 은퇴 후 활동을 겅우를 통해 계속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일을 계속하고 계셨다. 푼유중학의 교장 일이 힘든 것이었지만 큰 학교를 경영하는 책임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셨다. 그분은 학교의 교육수준을 높이고 학생 수를 크게 늘린 훌륭한 교장으로 중국인사회의 존경을 받으셨다. 그래서 학교 이사회는 그분의 연임을 계속 요청해서 65세가 될 때까지 그 자리에 계셨다.
할아버지 퇴직 후 두 분과 ‘함께 또 따로’ 살 방안을 강구했다. 본채 곁에 노인들이 계실 별채를 붙여 짓는 설계를 생각했다. 페탈링자야의 개발은 아직 진행 중이었고 PJ 개발공사는 땅 판매에 열심이었다. 제안받은 부지 중에 아주 마음에 드는 것이 있었다. 우리 친구 첸분피의 건축회사 디자인-4에 설계를 부탁했다. 침실 넷과 큼직한 서재, 응접실, 식당과 야외생활을 위한 테라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별채가 담긴 설계를 부탁했다. 두 분의 이곳 생활이 편안하기 바라는 마음에서 별채 공간을 넉넉하게 잡았다.
디자인-4에서 아주 거창한 설계를 가져왔다. 현관을 위층에 두고 거실과 식당을 아래층에 둔다. 현관 바로 오른쪽에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넓은 계단이 있다. 주차장 뒤에는 별채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30평 가까운 널찍한 별채에는 거실-식당과 서재, 침실, 욕실, 그리고 별도 부엌이 있다. 하녀방도 따로 있다.
1964년 여름까지 모든 준비를 끝내고 건축을 시작했다. 겅우는 모든 결정을 내게 맡기고 서재가 큼직했으면 하는 것 외에 아무 요구가 없었다. 1965년 5월에 입주했는데, 겨우 3년 남짓밖에 살지 못했다. 오스트레일리아로 갈 때 그곳에서는 그런 집에서 살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18년 후 홍콩에 가서야 더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었다! 그 집 짓는 데 애를 쓰고 너무 많은 기억이 쌓인 집이라서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3년 후 돌아와 살려는 마음으로 팔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 이제 돌아보면 어리석은 생각이었고, 잘못된 결정이라는 사실이 차츰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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