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모자무싸’ 차영훈 연출 “산다는 건 나의 무가치함과 싸우는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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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부터 20년간 지속돼 온 모임을 '8인회'라고 부르는 사진 속 친구들. 왼쪽 위 술을 마시고 있는 동만(구교환)을 제외하고 모두 영화업계에 자리잡게 된다.사진 스튜디오 피닉스·SLL·스튜디오 플로우
영화가 좋아 영화를 하고싶던 20대 여덟 명이 있었다. 동아리방에서 남의 작품을 보며 손가락질하고, 시나리오를 나눠읽던 이들 ‘8인회’ 멤버들은 20년 후 감독과 제작자 등으로 영화판에 자리잡는다. 딱 한 명만 빼고. 20년 동안 시나리오 열네 편을 썼지만 한 편의 영화도 만들지 못한 영화감독(지망생) 황동만이다.
이 남자는 8인회 모임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전에 했던 자기 얘기를 반복하고, 게걸스레 밥을 먹으며 입을 멈추지 않는다. ‘여기 있는 나 좀 보라’는 안간힘이다.
지난 18일부터 방영 중인 JTBC 토일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하 ‘모자무싸’) 얘기다. ‘모자무싸’는 ‘또! 오해영’(2016), ‘나의 아저씨’(2018), ‘나의 해방일지’(2022)로 단단한 팬층을 모은 박해영 작가의 최신작으로, ‘동백꽃 필 무렵’(2019), ‘웰컴 투 삼달리’(2023) 등을 만든 차영훈 감독이 연출했다.
차영훈 감독은 대본 속 이야기를 촘촘히 만들고 싶은 연출자다.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볼 때 최대한 몰입하게 하자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그럴법하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개연성, 핍진성에 집착하는 거죠"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모자무싸’의 시청률은 2%(닐슨코리아)대에 머물지만 넷플릭스에선 ‘대한민국 톱 10 시리즈’ 1위를 차지하는 등 화제를 모으고 있다. 총 12회 중 4회 방송을 마친 지난 26일, 차 감독을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작년 2월에 박해영 작가에게 연락이 왔어요. 차기작을 같이 해보자고. 내가 간택됐단 말이야? 생각했죠.”
그렇게 받은 1, 2화 대본 파일의 제목이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였다. 독특한 제목에 의아해하며 읽던 그는 문장에 턱턱 걸려 넘어졌다. “‘내 인생이 왜 니 마음에 들어야 하는데요’ ‘감독님은 천 개의 문이 다 열려 있는 사람 같아요’ 이런 대사를 읽을 때 가슴에 인장이, 불도장이 새겨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일상에서 쓰지 않는 말이지만 드라마 속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들었을 때 마음을 울리게 만드는 힘이 작가님 작품엔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내 장난기 있는 말투로 불안함과 허기짐을 표현하는 주인공 황동만. 지원사업 피칭에서 번번이 떨어지지만, "영화를 왜 하고싶냐"고 묻는 면접관에게 울먹이며 진심으로 대답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사진 스튜디오 피닉스·SLL·스튜디오 플로우
대본으로 만난 황동만은 낯설었다. “한국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으로 보지 못한 모습이었어요. 정말 찌질하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인물. 남의 작품에 대해 겉으로라도 칭찬 한 마디 못해주는 ‘후진’ 인간. 조금이라도 동만을 미화하려는 순간 작품의 장점이 사라질 거라고 봤습니다.”
황동만 역 배우를 캐스팅하기까지는 나흘 정도 걸렸다. 2회 대본을 받았을 때였다. 캐스팅 회의에서 박 작가가 “구교환 어때요?” 먼저 물었고 차 감독이 “좋은데요”라고 받았다. 구교환 배우도 대본을 받고 이틀 만에 출연을 결정했다.
변은아(오른쪽, 고윤정)는 영화제작사에서 일하는 7년차 제작자다. '도끼'로 불릴 만큼 솔직한 피드백을 주는 사람이지만, 자신 안의 짙은 우울과 함께 살아가는 인물로 황동만의 인간다움에 끌린다. 사진 스튜디오 피닉스·SLL·스튜디오 플로우
황동만의 대담함을 동경하고, 그에게 위로받는 또 다른 주인공인 영화사 기획PD 변은아도 ‘로스쿨’(2021),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문의 생활’(2025) 등 전작에서 단단한 이미지를 보여줬던 고윤정 배우로 빠르게 정해졌다.
감독에겐 1화의 시퀀스가 특별했다. 친구 박경세의 영화 시사회 뒤풀이를 간 황동만은 모두에게 들리는 목소리로 연출과 배우를 욕하다 “뭐하는 사람이냐”는 말을 듣는다. 감독이라고도, 백수라고도 말하지 못한 부끄러움에 자리를 뜬 황동만은 버스 창문에 머리를 내리 찧다가, 집에 가는 내리막길에서 이 문장을 두 번 외치며 뛰어가다 굴러 넘어진다.
“잘나서 나를 증명할 수 없다면, 망가져 나를 증명한다.”
차 감독은 “황동만이 살아남기 위해 어떤 몸부림을 치고 있는지 보여준다”며 “황동만의 ‘후짐’을 변명하는 장면이라 잘 찍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황동만(왼쪽)과 변은아의 또 다른 공통점은 '감정워치'를 차고 있다는 거다. 둘은 감정워치 속 단어가 뜰 때마다 알 수 없는 초조함과 불안함이 명쾌히 정리된 듯한 표정을 짓는다. 사진 스튜디오 피닉스·SLL·스튜디오 플로우
드라마는 황동만을 시종일관 연민하며 나아가진 않는다. 감독에 따르면 “황동만은 가볍게 우울을 돌파하여 나아갈 수 있는 ‘히어로’”다. 주변에 촌철살인하며 ‘무가치함에 몸부림치는 당신과 나는 다를 바 없음’을 상기시키는 인물에 가깝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황동만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주변 인물에 몰입하게 된다. 차 감독은 “앞으로 남은 회차에서는 변은아와 박경세 등 주변 인물의 이야기가 펼쳐질 예정”이라고 전했다. 매순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고, 이를 위해 자신만 아는 ‘나의 무가치함’을 덮으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이다.
차 감독은 “저도 그렇고, 이 작품을 찍는 스태프들도 인물들이 느끼는 무가치함의 고통에 공감했다더라”고 전하며 “시청자들을 ‘원래 산다는 것이 무가치함과 싸우는 고해(苦海)다. 당신이 동경하는 저 사람도 똑같이 고통스럽다. 그러니까 버텨보자’라고 위로하고 싶다”고 말했다.
차영훈 감독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생긴 이래 (동만이 느끼는) 불안함, 허기짐, 무가치함과의 투쟁은 꾸준히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원래부터 있었던 문제를 드디어 우리가 쳐다보게 된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우리 이야기도 '너는 가치 있어' 보다는 '모두가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고 위로하는 드라마라고 생각했어요."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평범한 감정을 건드렸지만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저희 드라마는 한 겹의 감정만 다루지 않아요. 내가 쟤를 이겼어, 신나.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어, 슬퍼가 아니에요. 대부분의 상황과 인물의 감정이 세 겹씩 쌓여있다고나 할까요. 작가님께 ‘인물이 지금 느끼는 감정의 맨 바깥 겹은 무엇인지, 몇 퍼센트 정도로 짙은지’를 매번 물어보며 찍었어요. 한 장면 한 장면 밀도가 정말 높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황동만이 ‘영화는 기분 마사지’라고 하잖아요. 우리 드라마도 열두시간짜리 ‘싸구려 기분 마사지’ 같은 겁니다. 하지만 그 마사지가 끝나고 나면 분명히 기분이 나아질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는 게 만만치 않지만, 나만 그렇지 않다는 위로가 뭉친 어깨를 풀어줄 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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