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사이렌 울렸다고 철거된 1970년 전위 예술, 되살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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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자의 '무체전'(1970)이 서울 리움미술관의 '다른 공간 안으로: 여성 작가들의 공감각적 환경 xxxx-xxxx'에서 발굴, 재구성됐다. 사진 리움미술관

검은 장막 안으로 들어가자 연기가 낮게 깔렸다. 사이렌이 울리고, 얼굴에 조명이 비쳤다. “여러분은 지금 나의 작품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여자 목소리가 울렸다. 정강자(1942~2017)의 ‘무체전(無體展)’, 1970년 서울 국립공보관에서 연 첫 개인전이었다. 전위예술을 정치 선동으로 여긴 정부 지시로 사흘 만에 철거된다. 도발적인 행위 예술과 실험 미술을 선보이던 정강자는 이때의 충격으로 이후 그림만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

다음달 5일부터 리움미술관 ‘다른 공간 안으로’ #정강자의 ‘무체전’ 발굴·복원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고자 했다”는 작가의 메모와 스케치, 당시 기사 등으로만 남아 있던 ‘무체전’이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56년 만에 복원 전시된다. 다음 달 5일부터 열리는 ‘다른 공간 안으로: 여성 작가들의 공감각적 환경 xxxx-xxxx’의 하이라이트다. 1970년 당시 전시장을 지키며 관람객들에게 확성기로 말했던 28세 정강자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유족들이 제공한 목소리를 AI로 되살려 안내 방송을 재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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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환경 예술로 기록된 야마자키 츠루코의 '빨강'(1956). 사진 리움미술관

‘환경(ambiente)’은 방에 들어가 작품에 둘러싸인 관객이 빛·소리·색·공기·움직임을 경험하는 예술 형식으로 1949년 이탈리아의 루치오 폰타나가 제시한 개념이다. 첫 환경 예술은 1956년 일본의 실험 미술 동인인 구타이의 여성 멤버 야마자키 츠루코의 ‘빨강’. 1976년 제37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열린 ‘환경/예술’ 전시를 끝으로 ‘설치 미술’이라는 용어로 대체됐다. 환경 예술은 보존과 수집이 어려운 특성상 주류 미술에 들어오지 못했다. 남성 위주 미술계에서 이러한 조건은 여성 미술가들에게 ‘해방의 공간’으로 작용했지만, 이들의 작업은 기록되지 못한 채 미술사에서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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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삶의 여정에 따라 무지개빛 조명이 비치고, 홀스트의 '행성'이 울리는 나일론 터널은 알렉산드라 카수바의 '스펙트럼 통로'(1975). 사진 리움미술관

전시는 이렇게 사라진 작품과 잊힌 이름을 복원하는 자리다. 2023년 뮌헨의 하우스 데어 쿤스트에서 시작, 로마의 국립 21세기 미술관(MAXXI), 홍콩 M+를 거쳐 리움미술관으로 이어지는 프로젝트다. 전시를 처음 기획한 안드레아 리소니 하우스 데어 쿤스트 예술감독과 마리나 푸글리에세 밀라노 문화 박물관(MUDEC) 관장은 전 세계에 흩어진 서신, 건축 도면, 당시 비평 기사 등을 4년 넘게 조사해 사라진 작품들을 되살렸다. 29일 리움미술관을 찾은 이들은 이 과정을 “포렌식(과학 수사)과도 같았다”고 돌아봤다. 리소니 예술감독은 “여성 미술전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조사 시작 1년 만에 모아둔 자료를 살펴봤더니 ‘여성 작가들이 창안한 환경’이라는 연결점이 보였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환경 예술의 역사는 파괴와 소실의 역사다. 당시 작업은 보존하기 어려운 실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기에 여성 작가들은 미술사와 환경 예술의 역사 양쪽 모두에서 잊히거나 지워지는 이중의 소외를 겪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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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36㎏의 거위털로 채운 주디 시카고의 '깃털의 방'(1966). 사진 리움미술관

브라질의 리지아 클라크, 아르헨티나의 마르타 미누힌, 이탈리아의 난다 비고 등 다양한 지역의 여성 미술가 11명의 8점도 복원됐다. 미국 주디 시카고의 ‘깃털의 방’(1966)은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거위털로 방을 가득 채워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을 자아냈다. 1960년대 미국 미니멀리즘의 남성 미술가들이 즐겨 쓰던 강철의 차가운 물성과 대조된다. 리투아니아 출신 알렉산드라 카수바의 ‘스펙트럼 통로’(1975)는 탄생·죽음·재생으로 이어지는 삶의 여정을 뜻하는 무지갯빛 조명이 반짝이는 나일론 천 통로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게 관객을 품는 이들 작품에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가장 큰 작품은 ‘드림 하우스’. 라 몬테 영과 마리안 자질라가 빛과 소리를 전시하며 1960년대 뉴욕에서 첫선을 보인 ‘드림 하우스’에는 2003년부터 최정희가 합류, 환경 예술의 오늘을 보여주고 있다. 미술관은 무엇을 기록하고 보존할 건가. 여전히 조명되지 못한 것은 없을까. 전시가 남긴 질문이다. 11월 29일까지. 성인 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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