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역사의 쓸모” 외치며, 5년의 학과장 생활 시작했다 [왕겅우 회고록-청년기(17)]

본문

XVII
Settling Down / 자리를 잡다.

아들 밍의 교육은 런던에서 지내던 해에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네 살 된 아이를 머스웰힐의 유치원에 보냈는데, 그곳 보모들이 읽기와 쓰기를 확실히 가르쳐줬다. 어느 날 아이가 티브이 광고 화면 읽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던 기억이 생생하다. KL로 돌아온 후 학교 들어갈 때까지 1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늘 읽을 책을 더 달라고 졸랐고, 우리는 그 요구에 힘껏 응했다. 공부의 인생이 잘 시작되는 것 같았다. 정착하던 시기의 걱정을 마거릿은 이렇게 적었다.

“그 시절에는 유치원이 아주 적었다. 일곱 살이 돼야 학교에 들어갈 수 있어서 아이가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 사설 유치원이 더러 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의 친구인 자매가 운영하는 곳이 하나 있었다. 딸애들은 소학교 들어갈 때까지 거기 다니게 했다. 밍은 벌써 글을 읽었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학교에 들어가 ABC를 가르치는 것을 보고는 안 가겠다고 뻗댔다. 다행히 우리 아는 사람인 교장이 아동백과사전 읽는 아이를 글 모르는 아이들과 같은 반에 넣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인정했다. 위 학년 반에 넣어주어 계속 다니게 됐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는 사이에 우리 가족은 더욱 튼튼하고 건강해졌다. 겅우는 학과 발전에 참여하면서 대학 행정에도 책임을 맡게 되었다. 나는 학생들 언어능력 향상에 바빴고, 소소한 건강 문제나 통상적인 집안일을 제하고는 우리 삶이 매우 생산적으로 진행되었다.
주말에는 아이들 데리고 소풍을 다니거나 놀이터 같은 데를 찾아다녔다. 휴가 때는 동해안의 켈란탄과 트렝가누에 가기도 했다. 한 번 말라카로 갔을 때는 말라카휴양소에서 묵었다. 영국인들은 도시마다 그런 휴양소를 지어놓았다. 공무 중의 관리들이 묵는 여관 같은 곳이었다. 운영자는 대개 하이난(海南) 사람들이었는데, 하이난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커피숍이나 식당을 많이 경영해 왔다. 휴양소는 값이 싸고 일반인도 이용할 수 있었다. 넓은 베란다가 딸린 별장 풍의 꽤 예쁜 건물이고 식당이 들어 있었다.”

내가 학부장일 때 역사학 교수 존 배스틴이 갑자기 사직하고 런던에 간다고 해서 우리 모두 놀랐다. 우리 대학은 영국 관습에 따라 학과마다 교수 하나를 두고 학과장을 맡겼다. 존의 후임자가 학과장도 맡아야 할 형편이었다. 나는 중국-동남아시아 관계의 역사에 덧붙여 우리 지역 중국인 주민에 관심을 계속 기울이며 동아시아사 강사(lecturer) 자리에 만족하고 있었다. 교수직이나 학과장직을 맡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친구들과 동료들이 부추겼다.

1963년 8월에 교수직 제안을 받았다. 그렇다면 학과 일에 전념하고 그 발전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년 맡은 학부장직은 그만두겠다고 했다. 교수진과 대학 당국의 허락을 받아 임명을 받아들이고 즉각 학과로 돌아왔다.

벅찬 일이었지만 학과 발전을 책임지는 5년의 기간을 나는 즐겁게 지냈다. 대학은 자라나고 있었고 역사학 전공을 지망하는 학생도 늘어났다. 작은 교수진이었다. 알라스테어 램과 나는 1959년에 부임했다. 알라스테어는 남아시아사와 중앙아시아사를 강의하면서 섬 지역에 대한 인도의 초기 영향과 고고학 연구에 관심이 많았다. 존 배스틴은 싱가포르의 동료 데이비드 배셋과 메리 턴불을 청해 와 동남아시아사의 여러 시대를 강의하게 했다. 지역 고고학자 브라이언 피코크가 국립박물관에서 건너와 알라스테어와 도와가며 일하게 되었다.

우리 과의 첫 인도네시아 연구자로 얀 플루비엘을 채용했다. 케임브리지에서 만났던 존 프로드셤은 두 번째 중국사 담당자가 되었다. 그는 1875-78년간 첫 주영 중국대사를 지낸 궈송타오(郭松燾)의 일기를 연구하고 있어서 중국근대사 강의를 맡겼다. 그 뒤를 이어 중-러 관계사 연구자, 유럽사 전문가, 정치사상사 연구자, 그리고 말레이-폴리네시아 역사를 강의할 사람 하나가 들어왔다.

몇 해 지나는 동안 한편으로 교수진이 확대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새 자리를 만드는 한편 빈자리를 채워야 했다. 말레이-회교권 역사를 가르칠 윌리엄 로프와 말레이열도 근대사에 집중하는 앤서니 리드를 초빙했다. 다양한 역사적 관점을 소개해준 방문교수들이 학과에 큰 도움을 주었다. 런던 소아스와 예일대학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고 풀브라이트 방문교수 다섯 명 중에 둘은 미국사 강의를 개설해 주었고 셋은 인도네시아사, 태국사와 버마사를 각각 강의했다. 이즈음에는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자주 찾아오는 역사학자와 사회과학자들도 있어서 강연을 부탁했다. 학생들은 특히 아놀드 토인비의 방문에 기뻐하며 그의 문명사관에서 동남아시아의 위치에 관한 그의 견해를 열심히 들었다.

싱가포르의 말라야대학 동문들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말라야-싱가포르 역사의 두 사람, 경제사를 가르칠 한 사람, 그리고 네덜란드동인도회사와 인도네시아 현대사를 전공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쿠케이킴과 롤린스 보니가 19세기 말레이국가들에 관한 석사논문을 쓰도록 권유했다. 두 사람은 아주 좋은 논문을 써서 옥스퍼드대학출판사에서 출판되고 곧 교수진에 합류했다. 그 외에 다른 대학 출신의 지역 연구자도 찾아서 카이날 아비딘 와히드와 제임스 P. 옹킬리(두 사람은 퀸슬랜드대학 출신), UCLA 출신의 스티븐 레옹과 하버드 출신의 고쳉테익을 교수진에 넣었다.

대학원과정에 외국 학생도 받기 시작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홍콩, 뉴질란드와 동아프리카에서 영연방 장학금으로 온 학생들이 있었다. 몇 명은 다른 대학의 연구직으로 진출했다. 인도에서 온 라지 바실, 케냐에서 온 제임스 알렌과 뉴질랜드에서 온 마이클 스텐슨의 연구 주제가 특히 흥미로웠다. 모두 말라야-말레이시아 역사를 공부해서 연구서를 발간했다. 똑똑한 학부생도 많이 있어서 우리 학과는 곧 활기찬 활동 중심지가 되었고, 십 년 있는 동안 심심할 때가 전혀 없었다.

1968년 떠날 때까지 우리 학과는 넓은 범위의 강의 역량을 갖춘 다양성 있는 학과일 뿐 아니라 말레이시아-동남아시아 역사 연구의 중요한 거점이 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관심의 초점은 계속 동남아시아 역사에 있었고, 말레이시아 역사를 그 핵심으로 키워냈다. 그러나 또한 이 나라와 중요한 관계를 가질 여러 지역, 특히 남아시아와 동아시아, 서양(유럽과 미국), 그리고 아시아-아프리카의 신생국들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를 넓혀줄 강의들도 개설했다. 나는 졸업생의 역사 지식이 국가에 대한 봉사의 좋은 조건이 된다는 믿음을 “역사의 쓸모”란 제목의 취임강연에서 토로하기도 했다. 학생들이 시민으로서 지식과 능력을 갖추게 해주는 균형 잡힌 교과과정을 제공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내 강의는 책임시간을 계속 채웠으나 중국사 강의를 하나 줄이고 사학사를 가르치는 “역사의 이론과 방법” 강의를 만들었다. 이 강의가 솔직히 나 자신에게 재미있었던 것은 강의 내용 못지않게 뛰어난 학생들을 소그룹으로 지도하는 방법이었다. 학생들이 여러 민족의 역사에 접근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여러 역사서술 방법의 가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많은 학생이 졸업 후 진로를 잘 찾아 나가는 것도 기쁜 일이었다.

내가 이렇게 새로운 일에 빠져 지내는 동안 마거릿은 제2국어로서 영어 교육의 전문가로 입지를 굳혀가고 있었다. 이 나라에서 우리가 자리 잡아가는 과정을 아이들에게 들려주려고 적은 이야기 중에 캔버라로 떠나기까지 5년간의 기록을 이렇게 적었다. 캔버라 행은 내가 얼마동안 접어놓았던 중국사 연구에 집중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그동안 나는 대학 바로 옆에 있는 판타이 힐의 말레이시아사범대학(MTC)에서 일하고 있었다. 중등 교원 양성기관이었다. 인문학 과목들과 외국어로서 영어 과목이 있었다.
당시 교육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많았다. 정부는 모든 국립(정부가 재정을 지원하는) 학교의 교육에 말레이어를 쓰고 싶어 했다. 영어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중국어 학교도 국정 교과과정에 따르고 말레이어를 필수과목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사립학교는 계속 존재했다. 학생이 대학에 들어가려면 말레이어를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새 학교들을 위해 많은 교사를 양성할 필요가 있었고 영어는 제2국어로 유지되었다.
대학 친구 덜시 나바라트남(후에 덜시 에이브러햄)이 사범대학의 영어과 과장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가르치는 일이 즐거웠다. 학생들 영어 실력이 약한 것이 한 가지 걱정이었다. 나는 모든 입학생이 중학 졸업시험이나 검정시험에서 단순한 합격 수준을 넘어서는 영어 성적을 따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성적을 따지 못한 학생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았다. 전원 장학생인 사범대학을 대학에 가는 경유지로 여기는 학생들이 많았고, 실제로 졸업 후 교원 노릇을 잠깐 하다가 대학에 진학하는 졸업생이 많았다.
2년 후 덜시가 조호르바루 사범대학 영어과장으로 옮겨가면서 내게 KL의 과장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현지인 교수 중에 내가 선임자였고, 맡을 만한 일이라 생각해서 맡았다. 1968년 8월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마거릿은 이에 이어 아이들이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말라야대학에서 내가 한 일에 대한 자기 생각을 적었다.

“겅우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63년, 만 33세가 되기 전에 역사학 교수가 되었다. 학생 시절과 달리 아주 부지런해져서, 강의 준비도 발표와 출판도 열심히 하고 사회 활동과 대학 내 활동도 활발했다.
겅우는 판단력이 뛰어나서 조언을 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실제보다 많은 나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초기의 남해 교역 연구는 1958년에 출판되었다. 그 후의 논문 ”오대 시기 북중국의 권력구조“가 말라야대학에서 출판되고 나중에 스탠퍼드대학출판부에서 재출판되었다. 그리고 중국계 말라야 주민들의 여러 범주와 그 정치 성향에 관한 논문 몇 편을 썼다. 그 범주가 해외 중국인사회의 분석에 유용하다고 본 연구자들이 많았다.
말라야대학 시절을 돌아보면 우리 삶의 중요한 시기였다. 새 대학을 물질적-정신적 양쪽 의미로 건설하던 시기였다. 전 세계에서 교수를 초빙했기 때문에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미 명성이 높은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로는 봉급도 좋았고 교수들은 사회적 존경을 받았다. 겅우는 그곳에서 초기의 명성을 쌓았다.”

KL을 떠날 때 우리는 몇 년 후에 돌아오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가 한 단원의 마감이었다. 내가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으로 옮겨가는 데 동의한 이유를 마거릿이 적은 것은 자기 방식이었다. 우리 모두 좋아하던 새집을 떠나는 데 아무런 아쉬움도 없었던 것처럼 적었다. 나도 그렇게 미련하지는 않다. 그러나 마거릿은 아쉬움 때문에 새 출발을 마다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캔버라에도 괜찮은 집을 새로 지었고, 그 집에서 우리는 15년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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