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실용에서 예술로, 갑골문에서 붓글씨로....3천년에 걸친 한자 필획 변천[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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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문명의 무늬
윤성훈 지음
교유서가
한자를 흔히 ‘뜻글자’라고 부른다. 그래서 한자 공부는 곧 글자의 의미와 소리를 익히는 과정으로 치부되곤 했다. 신간 『한자, 문명의 무늬』는 이러한 관성에 도전하며 한자의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인다. 저자 윤성훈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은 한자의 3요소인 모양(形)·소리(音)·뜻(義) 중 가장 직관적임에도 학술적 조명을 덜 받던 ‘모양’에 주목했다. 그 모양의 변천을 한자의 역사와 문명의 중심부로 끌어올리면서, 뾰족한 칼로 새긴 갑골문이 부드러운 붓의 서예로 변해가는 3000년의 과정을 추적했다.
상나라 무정 시기의 도주 각사 복골, 중국 국가박물관 소장 [사진 교유서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별개로 여겨지던 고문자학의 엄밀함과 서예사의 심미안을 하나로 엮어낸 데 있다. 고문자학은 대개 한자의 기원과 조형 원리를 고증하는데 주력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고고학적 증명에 머물지 않는다. 글자의 획이 굵어지고, 휘어지고, 때로는 파격적으로 뻗어 나가는 모양의 변화 속에 당대인들의 예술적 열망이 담겨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저자는 효율적 통치를 위한 ‘행정의 도구’였던 한자가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예술 영역으로 확장되는 흐름을 중시한다. 후한(後漢) 말 비석에 많이 보이는 ‘예서’(隸書), 남북조(南北朝) 시기 왕희지의 우아한 ‘행초서’(行草書), 당나라 초기 구양순의 근엄한 ‘해서’(楷書), 당나라 중기 안진경의 진솔하고 힘이 넘치는 서체, 북송(北宋) 소동파가 유배지에서 남긴 음울한 글씨에 대한 이야기가 한편의 대하드라마처럼 유려하게 펼쳐진다.
왕희지의 '난정서' 팔주제일본. 중국 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 [사진 교유서가]
수많은 한자의 숲속에서 저자는 필획 하나하나에 담긴 내밀한 표정까지 읽어내려 한다. 필획 속에는 그 시대의 정신과 예술가의 고민이 담겨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당나라 초기의 ‘해서’(楷書)는 서예사의 분기점으로 간주된다. 해서는 남조(南朝)의 유려함과 북조(北朝)의 강건함을 종합하여 만든 ‘서체의 표준’으로 평가된다. 남조를 대표하는 왕희지의 붓글씨에서 한자의 아름다움은 한 극점에 도달했지만, 새로운 통일 제국의 기강을 바로잡고 문화적 자신감을 표출하기에는 다소 유약해 보였다고 한다. 여기에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북조 석각(石刻)의 새김 글씨였다. 종이에 쓴 왕희지의 유려한 붓글씨와 돌에 거칠게 새긴 석각의 두 흐름이 만나 ‘해서’라는 거대한 종합의 물줄기가 형성되었다는 이야기다. 구양순의 글씨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해서의 모델로 손꼽힌다.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 [사진 교유서가]
서예의 변천사는 ‘완벽한 규범’이던 해서에서 그 흐름을 멈추지 않고 계속 변화해 나아갔다는 데 묘미가 있다. 해서 이후엔 다양한 개성이 만발하는 시대가 펼쳐졌다. 때론 완벽한 균형보다 의도적 불균형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책은 저자의 전작인 『한자의 모험』(2013)을 대폭 확대해 새로 펴낸 것이다. 분량 면에서 두 배 이상 늘었으며, 안진경의 글씨를 다룬 당나라 중기의 내용부터 송, 원, 명을 거쳐 청나라의 전각(篆刻)과 전서(篆書)를 다룬 장들은 본격적인 ‘서예사’라 해도 무방할 정도의 깊이를 선보이는데, 이 부분이 새로 들어간 내용이다.
안진경의 '안씨가묘비' 제1면. [사진 교유서가]
이 책은 서예사를 문화사와 접목시킨 가운데, 작품들 속 필획의 변화를 섬세하게 관찰하는 장면이 특히 돋보인다. 이는 저자가 서문에서 “크게 빚지고 있다”고 밝힌 일본의 서예가 이시카와 규요(石川九楊)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자라는 창을 통해 한·중·일 동아시아 문명을 흥미진진한 파노라마처럼 감상할 수 있도록 전문적 해설과 다양한 교양을 잘 버무림으로써 보고 읽는 맛이 나게 만들어낸 것은 온전히 저자의 몫으로 보인다.

안평대군 '몽유도원기' 1931년 촬영 유리건판. 일본 도쿄문화재연구소 소장. 원본 소장처는 일본 텐리대학 부속 텐리도서관. [사진 교유서가]
그런데 필획에서 시대정신이나 예술가의 마음을 읽어내는 서술 방식은 객관적 증명을 중시하는 이들로부터 ‘해석의 비약’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실제 서예를 할 때 발생하는 여러 서체의 혼용 양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했다는 지적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가치는 줄어들지 않을 것 같다. 읽을거리의 풍성함이 지적 자극을 부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고증학적 엄밀함과 예술적 상상력 사이의 위태로운 줄타기를 감수하면서 오랫동안 죽어있던 글자에 ‘숨결’을 불어넣음으로써, 우리가 잊고 지낸 동아시아 ‘서체 미학’을 일깨우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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