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아랍의 봄’ 돌아보면 안다, 혁명을 위해 SNS보다 중요한 것[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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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준비하는 시간
갈 베커만 지음
손성화 옮김
어크로스
2010년 초여름 페이스북에 포스팅된 칼리드 사이드의 ‘곤죽이 된 얼굴 사진’은 이집트의 장기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을 하야시키는 ‘아랍의 봄’의 기폭제가 됐다. 사이드는 이집트 경찰에 불분명한 이유로 체포돼 억울하게 맞아 죽었다. 와엘 고님이 ‘우린 모두 칼리드 사이드다’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이 사진은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의 반정부 시위의 원동력이 돼 이듬해 2월 무바라크를 물러나게 만들었다.

2011년 11월 22일 이집트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의 모습. [EPA=연합뉴스]
그 후 민주화의 기대가 부풀었지만 이집트는 결국 또 다른 군부 세력이 통치하는 나라로 되돌아가 버렸다. 페이스북은 혁명의 씨앗이 됐지만 기득권 독재 세력에 맞설 만한 현실적 토대를 갖춘 진정한 혁명 세력을 배양하는 데는 무용지물임이 드러났다.
『혁명을 준비하는 시간』의 지은이 갈 베커만은 시대를 바꾸는 변혁에는 페이스북 같은 도화선뿐만 아니라 확고한 이론적·사상적 바탕이 필요한데 이를 위한 ‘고요한 사유와 숙고, 의견 교환과 토론’의 시간이 선행됐다고 갈파했다. 지은이는 전화도 철도도 없던 17세기부터 소셜 미디어가 대세인 현대에 이르기까지 혁명이 어떤 경로를 통해 단단한 힘을 얻었는지를 추적했다. 혁명의 기반에는 과학자들의 편지 교환, 청원서 운동, 독립잡지 등을 통한 ‘고요한 대화’가 튼튼한 반석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17세기 프랑스의 자연철학자 니콜라클로드 파브리 드 페이레스크는 수만장의 편지 교환을 통해 유럽과 중동, 북아프리카에 있는 협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정확한 경도의 척도가 도출되는 자료를 수집했다. 편지를 통한 이 공동작업이 성공해 그는 세계 지도를 다시 그릴 수 있는 ‘혁명’을 완성할 수 있게 됐다.
1839년 6월 14일 영국 하원 의사당에는 128만959명이 서명한 길이 4800m의 ‘보통선거권’ 청원서가 입장했다. 퍼거스 오코너는 영국 법 규정에 명시된 청원권을 활용해 굴하지 않는 의지로 노동자 계급을 설득해 기어코 청원에 참여시켰다.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 청원 운동의 결과 영국에서는 1867년 일부 남성 노동자에게, 1918년에는 여성까지 포함한 보통선거권이 주어졌다.
1935년 영국의 식민지로 있었던 아프리카 골드코스트에서는 ‘아프리칸 모닝 포스트’라는 신문 발행이 허용됐다. 이 신문을 창간한 은남디 아지키웨는 독자 투고란인 ‘투덜이 구역’를 만들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을 마련했다. 투덜이 구역은 지면을 읽고 쓴 독자들이 새로운 아프리카에 대한 합의된 상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결국 골드코스트는 아프리카 최초의 독립국 가나로 태어났고 범아프리카주의의 거점이 됐다.
1968년 소련 반체제 인사들의 소식지 사미즈다트와 1992년 워싱턴의 독립잡지, 2020년 뉴욕의 보건 역학자들의 메일에서도 급진적인 사고가 고요하고 느린 시간을 견딘 후에야 혁명이 달성된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가 지배하는 지금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사회를 변혁시키는 혁명적 사고가 탄생하고 무르익고 숙성되는 고요의 시간과 폐쇄된 공간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2020년 8월 27일 워싱턴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 넷째 날 밤 백악관 밖 라파예트 광장에서 한 남자가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깃발을 들고 있는 모습. [AP=연합뉴스]
예외는 있다.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 운동은 #BlackLivesMatters라는 해시태그로 유명하지만 주요 활동가들은 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다지고 네트워크를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과감히 로그아웃을 선택했다.
이 책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는 크다. 격동의 현대사를 겪은 한국은 그 어느 나라에서보다 혁명적 시기가 많았다. 위의 사례들처럼 한국의 운동가들은 인고의 시간과 격렬한 토론을 통해 단단한 네트워크를 형성한 경험이 풍부하다. 소셜 미디어 시대에도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혁시키는 혁명이 성공하기 위한 비결이 이 책에는 선물처럼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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