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독일 거장 빔 벤더스가 그린 안젤름 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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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거장 빔 벤더스 감독(오른쪽부터)이 독일의 신표현주의 미술가 안젤름 키퍼의 작품세계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안젤름'(2023)이 5월 13일 개봉한다. 두 거장은 모두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1945년에 태어났다. 사진 에무필름즈

1969년 독일의 한 미술대 학생이 아버지의 군복을 입고 유럽 각국의 상징적 유적들을 방문해 나치식 경례를 했다. 이런 자화상 사진을 엮어 발표까지 했다. 독일 신표현주의 미술가 안젤름 키퍼(81)의 ‘점령(Occupations)’ 연작이다. 당시 ‘네오 나치’의 맹랑한 도발로 치부되며 공분을 샀지만, 이후 전후 독일 사회의 망각과 위선에 맞선 예술작품으로 재평가됐다.
“1968~69년 즈음은 2차 세계대전, 파시즘 같은 화제가 전혀 언급되지 않았어요. 학교에선 3주 동안 수업하고 끝이었죠. (중략) 저는 모두의 얼굴 앞에 거울을 들었던 겁니다.”
훗날 키퍼가 밝힌 소회다.

13일 개봉 다큐 '안젤름' #독일 거장 벤더스 감독 #나치 경례 화가 키퍼 재조명 #"전후 독일 망각 맞선 용기, #키퍼 내면의 어린아이에서 나와"

이런 장면을 담은 다큐멘터리 ‘안젤름’(2023)이 13일 개봉한다. 키퍼와 나란히 1945년 패전 독일에서 태어난 동갑내기 독일 영화 거장 빔 벤더스(81) 감독이 독일 미술계에 악명 높은 키퍼의 평생에 걸친 작가 세계를 다뤘다. 키퍼가 1992년부터 프랑스 남부 바르작에 조성한 예술 단지가 주 무대다. 외면받은 역사와 신화를 소재로 하는 백발 키퍼의 작업 과정이 만져질 듯 생생하게 펼쳐진다. 고대 신화 속 여인들에 영감 받은 하얀 드레스 조각상들 사이로 주문 같은 속삭임이 들려온다. “하지만 우리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의 진실을 잊지 않는 것. 1991년 한 식당에서 서로를 우연히 만났다는 키퍼와 벤더스 감독, 두 예술가를 평생지기 친구로 만든 화두였다.

패전 후에도 나치 교사가 가르쳤다…독일 거장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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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안젤름'에는 안젤름 키퍼가 초대형 화폭을 채우는 역동적 작업방식도 드러난다. 그는 캔버스를 태우고 쇳물을 붓고, 메마른 건초더미를 쏟아부으며 그림을 완성한다. 다큐 속 인터뷰에서 그는 "탱크가 지나간 자리를 그냥 그릴 수 없다"고 말한다. 사진 에무필름즈

벤더스 감독은 극영화 ‘파리, 텍사스’로 1984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후 쿠바 뮤지션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혁신적 무용가 피나 바우쉬, 프란치스코 교황 등을 담은 다큐로 연출 반경을 넓혀왔다. 2019년 키퍼와 재회한 그는 한때 오해와 편견에 가려있던 키퍼의 예술인생을 심도 깊게 돌아본 다큐 제작을 도모했다. 키퍼와 이후 2년간 7차례, 녹취록만 1000쪽 넘는 분량의 인터뷰를 진행하며 1940~50년대 독일에서 자란 키퍼의 유년기 재현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확신하게 됐다고 한다. 이 영화가 칸영화제에 초청된 2023년 글로벌 미술 매체 아트넷뉴스와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벤더스는 이어 “당시 독일은 나치즘에 대해 침묵하는 ‘침묵의 시대’였다”면서 “안젤름과 나는 어린시절 나치 교사들에게 교육 받으며 자란 공통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돌아봤다.

다큐에서 키퍼가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밝힌 대목은 벤더스 감독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키퍼에 대한 동질감 때문일까. 이번 다큐에서 키퍼의 젊은 시절 재현에 키퍼의 친아들을 캐스팅한 벤더스 감독은, 키퍼의 소년기 아역에는 자신의 조카손자를 출연시켰다.

벤더스 감독은 양심적 의사 아버지 덕에 어릴 적 아우슈비츠에 관한 금서를 읽으며 독일의 민낯에 눈떴다. 이후 나치 선전 도구였거나 그 자장 안에 머물렀던 ‘아버지 세대의 영화’는 죽었다고 결별을 고한 오버하우젠 선언(1962)에 동참하며 뉴저먼시네마 태동의 핵심 감독이 됐다. 대표작 ‘베를린 천사의 시’(1987)에선 독일의 역사적 아픔과 과거 유령들이 여전히 동시대를 떠돌고 있음을 시적으로 표현했다.

독일 떠난 벤더스, 히틀러 망령 되새긴 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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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안젤름'은 안젤름 키퍼가 1992년부터 프랑스 바르작에 조성한 10만평 이상의 예술 단지가 주 무대다. 고대 신화 속 여인들에 영감 받은 하얀 드레스 조각상들 사이로 주문 같은 속삭임이 들려온다. “하지만 우리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사진 에무필름즈

독일의 과오에 대해 “혐오감에 휩싸였던”(아트넷뉴스) 벤더스 감독은 결국 모국을 떠나 미국·호주·일본 등 외국을 떠돌며 작품활동을 했다. 키퍼는 정반대였다. 키퍼는 히틀러의 망령이 도사린 공간에서 진실의 파수꾼 역할을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벤더스 감독은 그런 키퍼에게 일생의 영감이 돼준 두 가지에서 해답을 찾아간다. 바로, 가난한 소년 시절 그가 고향 지역 영주의 성에서 전 세계 예술작품으로 가득 찬 방을 드나들며 예술의 순수한 아름다움에 세례받았던 순간, 그리고 부모를 모두 강제수용소에서 잃은 홀로코스터 생존 유대인 시인 파울 첼란, 시대 정신을 예리하게 포착했던 오스트리아 시인 잉게보르 바흐만의 시들이었다.

다큐에서 소년 시절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통해 자연의 미학을 재발견한 키퍼는 첼란의 시에 눈뜬 중년이 되어 여름의 빛을 잃고 좀비처럼 말라버린 해바라기 밭을 다시 마주한다. 다큐에서 벤더스 감독은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1944~45 추정)에 영감 받은 걸로 알려진 키퍼의 대표작 ‘너의 금발, 마르가레테’(1981)의 탄생 과정을 이런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이를 통해 키퍼의 물러섬 없는 작품 활동이 일종의 순수성, 예술과 인간성을 향한 열정을 잃지 않고 지켜왔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다큐는 또 흔히 ‘내면의 어린아이’라 일컬어지는 이런 순수성이 우리 사회가 역사를 반성하며 양심적 미래로 전진하기 위한 열쇠일지도 모른다고 암시한다. 다큐의 명장면이 탄생한 배경이다. 노년의 키퍼가 소년시절 자신을 어깨에 멘 채 있는 그대로의 자연 풍광을 응시한다. 그 뒷모습이 평화롭고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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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안젤름'에서 노년의 실제 안젤름 키퍼가 영화 속 소년시절을 재현한 아역배우를 어깨에 메고 서있는 뒷모습 장면이다. 사진 에무필름즈

다큐 ‘안젤름’은 지난 6일 앞서 개막한 ‘빔 벤더스감독전-파트 2. 예술가의 영혼’ 상영회 일환으로 개봉했다. ‘피나’ ‘안젤름’ ‘도쿄가’ ‘룸 666’ 등 벤더스 감독의 다큐 4편을 모아 상영한다. 다만, 이번 개봉판은 2D 버전만 수입됐다. 벤더스 감독이 ‘안젤름’에서 전작 ‘피나’(2011)보다 진일보한 영상 기술로 구현한 입체 영상은 아쉽게도 이번에는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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