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1년새 10위→26위...‘공시가 황제’ 트라움하우스의 추락 [안장원의 부동산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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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청담동 초고가 주택이 등장하기 전까지 17년간 공시가 최고가였던 서초구 서초동 트라움하우스5차.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트라움하우스5차. 전용면적 226~273㎡ 18가구의 고급 연립주택이다. 면진(免震)층 공법과 지하 방공호를 갖춰 한때 가장 안전한 집이자 재벌이 많이 살아 '회장님 저택'으로 불렸다. 2003년 준공돼 공시가격(2005년 이전은 기준시가) 리스트에 오른 2004년부터 2020년까지 17년 연속 전국 최고가 공동주택 자리를 지켰다. ‘공시가 황제’였다.
지난달 29일 결정된 올해 공동주택 공시가격을 보면 트라움하우스5차의 최고 공시가가 78억6800만원. 지난해와 같다. 변동률 0%. 같은 기간 서울 평균은 18.67%, 서초구는 22.07% 올랐다. 시장이 뛰는 동안 황제만 제자리에 머문 것이다.
올해 트라움하우스5차 공시가 '제자리'
공시가격을 산정한 한국부동산원은 “인근 지역 및 동일수급권 안의 유사지역에 있는 공동주택의 거래사례와 방매사례(호가), 시세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산정했다”고 설명했다. 트라움하우스5차 거래가 거의 없다가 지난해 거래 사례가 나왔다. 2021년 이후 4년 만이다. 전용 244㎡가 58억원에 팔렸다. 244㎡ 거래는 실거래가가 공개된 2006년 이후 처음이다. 2021년엔 273㎡가 185억원에 팔렸다. 두 주택의 크기 차이를 고려해도 가격 상승세가 꺾였음을 알 수 있다.
올해 순위가 어떻게 될까. 트라움하우스5차는 2021년부터 밀리기 시작해 지난해까지 가까스로 10위권를 유지했다. 그런데 올해는 10위권에서 사라졌다. 기자가 초고가 주택 공시가를 비교해보니 26위로 나왔다. 1년 새 16계단 미끄러졌다.
트라움하우스5차
트라움하우스5차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국내 초고층 주상복합의 대명사이고 '하늘 위 궁전'으로 불리던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최고 69층)도 처지가 비슷하다. 가장 큰 주택형인 전용 244㎡가 1위는 아니어도 다섯손가락 안에 들다가 2013년부터 10위권에서 볼 수 없더니 지난해 57위로 내려앉았다. 지난해 48억9000만원이던 공시가격이 올해 59억9500만원으로 22.6% 오르긴 했지만 강남구 평균 상승률(26.05%)에 못 미친다.
초고가 주택시장 세대 교체
두 단지의 동반 추락은 고급주택 시장 판도 변화를 보여준다. ‘부촌 지도’가 다시 그려졌다. 올해 공시가 10위권은 청담동(3곳)·한남동(4곳)·반포동(2곳)·성수동(1곳)이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서초동·도곡동은 명함조차 내밀기 어려워졌다.
초고가 주택의 기준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강남의 대형 평형’ 자체가 부의 상징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자산가들은 단순 면적보다 희소성과 경험 가치를 본다. 한강 조망, 호텔식 컨시어지, 프라이빗 커뮤니티, 철저한 보안, 소수 가구 구성이 새로운 경쟁력으로 떠올랐다.
대표적인 사례가 청담동 더펜트하우스청담(PH129)과 에테르노청담이다. 두 단지는 30가구 미만의 초소형 커뮤니티에 호텔급 서비스를 결합했다. 외부인 접근이 사실상 차단된다. 한강을 넓게 조망할 수 있다. 단순히 ‘비싼 집’이 아니다. 자산가의 일상을 ‘패키지’로 판매하는 상품이다. 트라움하우스5차는 구식이 돼버렸다.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 대명사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
1세대 초고층 주상복합도 퇴색했다. 타워팰리스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초고층 스카이라인과 호텔식 시설을 자랑했다. 지금은 전용면적 대비 실사용 면적이 좁고, 관리비 부담이 큰 게 단점으로 비친다. 아파트·오피스·상업시설이 섞인 점도 비선호 요소가 됐다.
신축 프리미엄도 빼놓을 수 없다. 초고가 시장에서도 ‘새집 효과’가 좌우한다. 2020년 이후 준공된 청담동 더펜트하우스청담·에테르노청담·워너청담, 반포동 래미안원베일리, 성수동 아크로서울포레스트가 곧바로 상위권에 진입한 이유다. 트라움하우스5차와 타워팰리스는 이미 준공 20년을 넘기며 노후화했다. 명품 시계도 케이스에 흠집이 나면 값이 내려간다.
부(富)의 주체가 바뀌었다. 과거 초고가 시장은 전통 재벌가와 대기업 오너가 끌어갔다. 지금은 정보기술(IT)기업 창업자, 스타트업 투자자, 유명 연예인, 스포츠 스타, 대형학원 ‘일타 강사’ 같은 신흥 자산가가 주도한다. 이들은 전통적 ‘강남 부촌’보다 자신의 취향과 상징성을 드러낼 수 있는 하이엔드 단지를 선택한다.
세대 차이도 뚜렷하다. 2·3세대 자산가는 1세대와 달리 보안 일변도의 ‘은둔형 빌라’보다 자기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브랜드형 하이엔드 단지’를 선호한다. 인스타그램 시대의 부촌은 더는 숨는 곳이 아니다. 보여주는 곳이다.
지난해와 올해 2년 연속 공동주택 공시가격 1위인 강남구 청담동 에테르노청담. 연합뉴스
한강 따라 초고가 시장 양극화
이 모든 변수를 압도하는 것이 한강이다. 올해 공시가 10위권 지역인 청담동·한남동·반포동·성수동은 모두 한강 변이다. 서울에서 추가 공급이 사실상 불가능한 한강 조망권이 절대적 가치로 자리 잡았다. 과거에는 ‘강남 입지’만으로 충분했다면, 이제는 ‘한강을 얼마나 누릴 수 있는가’가 가격을 결정한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초고가 시장은 과시 효과도 크다”고 말했다. 주택도 자산가들의 과시 욕구를 푸는 대상이 된 것이다.
앞으로 한강벨트 쏠림이 더 심해질 전망이다. 용산 국제업무지구 개발, 한남뉴타운 정비사업, 압구정 재건축, 성수전략정비구역 사업이 활발히 진행 중이다. 모두 한강을 끼고 있다. 조망과 신축 프리미엄이 결합되는 단지가 줄지어 쏟아진다.
초고가 주택시장에 나타나고 있는 양극화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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