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서울의 봄’ 최루탄 맞은 고대생…박형준 눈빛, 그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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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중앙플러스 - 6·3선거 후보 탐구

서울, 경기, 대구, 부산 광역단체장 선거. 그리고 부산북갑 보궐선거까지. 6·3 지방선거와 보궐선거에서 가장 뜨거운 격전지에 출사표를 낸 대형 주자들을 탐구합니다. 이들은 어떤 길을 거쳐 여기까지 왔을까요.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이 시리즈에서는 정치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그들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들여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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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부산시장 후보(왼쪽에서 둘째)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장 친한 친구들과 서울 중구 회현동에 있는 남산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함께 찍은 사진. 사진 박형준 국민의힘 부산시장 후보 캠프

1960년 3월 15일.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며 경남 마산에서 대규모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 시위에 참여했다 실종됐던 김주열(당시 16세)의 주검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시위는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갔다. 마침내 4월 19일 마산을 비롯해 부산과 서울 등 전국에서 학생·시민들이 시위에 나섰다. ‘4·19 혁명’이었다. 그날 부산에서 백 일을 며칠 앞둔 아이를 품에 안고 있던 한 여인도 거리로 나가 독재에 맞서 싸우던 시위대에게 손수 마련한 떡을 나눠주며 그들을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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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회군'으로 불리는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 집결한 학생 시위대 모습. 이전에도 대학생과 재야세력을 중심으로 시위가 계속됐으며 이날 시위가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학생회장단 결의로 자진 해산했다.[중앙포토]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80년 5월 13일. 서울은 다시 한번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이듬해 봄까지 이어진 정치적 자유화와 민주화 기대가 켜졌던 ‘서울의 봄’이었다. 시위대에게 떡을 나눠주던 엄마의 품에 안겨 있던 그 아이는 어느새 자라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3학년이 돼 시위대의 맨 앞자리에 있었다. 당시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의 계엄령 등에 반발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한창이었다.

이들이 서울시청과 플라자호텔 쪽으로 가고 있을 때 경찰의 사과탄과 최루탄, 페퍼포그(고추를 의미하는 'Pepper'와 안개를 발사하는 차량을 뜻하는 'Fogger'를 합친 말로 정식 명칭은 '깨스차'다)의 가스가 시위대를 덮쳤다. 그 순간 플라자호텔 벽을 맞고 튀어나온 최루탄이 그의 오른쪽 눈 등을 직격했다. 피를 흘리며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지하철 계단을 굴러떨어지다시피 피신했던 그 청년이 바로 부산시장 후보 박형준이다. 하지만 수배령이 내려져 사건 당일 경희대병원에서 임시 치료만 받고 이후 친척 집에 숨어지내며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당시 동네 안과에서는 "실명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지만, 부모님이 여러 약재를 구해와 먹은 덕분에 실명까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일로 '부동시 및 고도근시'로 병역 면제를 받았다. 그는 “한쪽 눈의 시력은 손상됐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민주주의 가치를 새롭게 볼 수 있는 또 다른 눈이 생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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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인회'라 불렀던 박형준 후보(왼쪽에서 둘째)와 그의 가장 친했던 고교 친구들. 사진 박형준 국민의힘 부산시장 후보 캠프

들어가며

박형준 국민의힘 부산시장 후보가 6월 3일 열리는 지방선거에서 세 번째 시장직에 도전합니다. 12·3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 사태로 지난해 정권이 바뀐 후 처음 치러지는 전국 단위 선거여서 그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힘겨운 싸움입니다. 글을 쓰던 문청(文淸)에서 운동권으로 그리고 언론사 기자, 시민사회 활동가, 교수와 방송패널을 거쳐 국회의원과 재선 부산시장을 역임하기까지 그의 인생 여정은 다사다난했습니다. 그가 쓴 글, 구술 자료, 인터뷰 등을 기반으로 굴곡진 그의 인생을 톺아봅니다.

"머라카노?"(뭐라는 거야?)

1966년 봄 서울 종로구의 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1학년 교실. 부산에서 전학 온 박형준(당시 7세)의 주위로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전학 인사말을 할 때 그의 부산 사투리가 아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자신을 촌놈 취급하는 아이들에게 박형준은 항변했지만, 그때마다“느그(너희) 란다. 느그”라며 그가 한 말을 더 흉내 내며 놀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악착같이 표준어를 공부해 1년도 되지 않아 서울 아이 못지않은 표준어를 쓰게 됐다.

사투리를 쓰던 ‘부산 촌놈’ 박형준은 이후 YS와 MB정부의 주요 요직을 거치며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사투리를 고친 것처럼 한번 마음 먹으면 이루고야 마는 '열정의 DNA’가 그를 성장시킨 원동력이었습니다. 그가 어떤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살아왔는지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울의 봄’ 최루탄 맞은 고대생…박형준 눈빛, 그때로 돌아갔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428425

“내 대구 며느리!” DJ가 띄웠다…6선 추미애 만든 31년전 그날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428415

오세훈, 똥거름 판자촌 살았다…한석규 제치고 CF스타 된 사연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425325

‘창자 끊기고 오장육부 뒤틀려’ 오세훈 구급차 실려가게한 男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425634

자서전 한줄 없이 구청장 됐다…오세훈도 놀래킨 ‘정원오 119’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427209

“네 딸 결혼식장 폭파시킨다”…삼성 ‘미스양’ 경기 뛰어든 사연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427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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